아무리 영화판 스탭진들의 나이가 어려지는 추세라지만, 제작부장 나이가 스물다섯이랬다. 게다가 일처리 능력에 대한 확실한 보증까지. 점점 그녀가 궁금해졌다. <오버 더 레인보우>의 제작사인 강제규필름을 찾아간 날, 바람머리에 핑클의 유리가 유행시켰다는 등 팬 니트를 입은, 틀림없이 신세대라고 써붙인 황현정이 등장했다. 아나운서 이름과 같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녀의 체구는 가냘파 보였으나 입매는 야무졌다. 사진촬영을 의식한 옷차림이 쑥스러운지 처음엔 어색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일 얘기로 들어가니 본래의 씩씩하고 편안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공주 영상정보대에 진학해 편집을 전공할 때의 교수님이자, 편집기사로 유명한 박곡지씨가 그녀를 영화판으로 이끌었다. 그때 박 기사의 손에 붙들려 따라간 곳이 99년 <연풍연가> 촬영현장. 애초에 PD에 관심있어하던 제자를 아는 스승은, 그녀를 기획실에 앉혀놓았다. 실습차원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뭐든 눈 빛내며 따라붙는 그녀를 두고 주위의 평이 좋았다. <연풍연가>를 거쳐, <빙우>라는 작품에 투입됐을 때다. 제작 초반부터 불안하더니 영화가 엎어질 기미가 보였다. 당시 <빙우>의 제작부장으로 있던 최기덕 PD는, “나이 어린 사람을 1년 이상 놀게 할 순 없다”며 이미 제작 스케줄이 잡혀 있던 <텔미썸딩> 제작부에 그녀를 포함시켰다. 겉으로는 놀리지 않겠다는 의도였지만, 바지런한 그녀를 자기 사람으로 껴안으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의 촬영기간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원래대로라면 8월쯤에 크랭크인이 됐어야 했는데, 캐스팅 문제로 여차저차 늦어지는 통에 가장 추울 때를 고르고 말았다. 덕분에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촉촉한 비(雨)신들이 제작진들에겐 슬프디 슬픈 비(悲)신이 되었다고. 한번씩 비를 뿌리고 나면 도로가 꽁꽁 얼어붙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인고의 과정이 계속되고, 1회 대여에 500만원 가량 든다는 ‘스카이 레인’이라는 특수 강우기를 2번씩이나 대여하고, 새벽 2시에 남산 1호 터널 앞을 임의로 봉쇄해 며칠에 걸쳐 게릴라식으로 찍었던 인서트 신은 결국 빛도 못 보고 폐기되는 정말 ‘슬픈’ 일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꼼꼼한 콘티북으로 스탭을 긴장시킨 안진우 감독도, 이 일은 두고두고 미안해했다는 후문.
<오버 더 레인보우>의 차기작인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감독)에서 제작 실장을 맡게 된 그녀가 요즘 무엇보다 뿌듯해하는 일은, 물론 부장에서 실장으로 승진한 것일 터지만, 웹 상에서 운영중인 커뮤니티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제작부의 역할과 현장 분위기를 알려 내고 있는 점과 스탭들의 급여를 월급제로 고정시킨 점. “돈 안받고도 일만 시켜준다면 하겠다”라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는 그녀는, “현장에서 모두가 잘 사는 길이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라며 다시 한번 고정 급여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똑 소리나는, 그녀다운 바램이다. 글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프로필
1978년생
공주 영상 정보대 영상 편집과 졸업
<연풍연가>(98) 기획실 직원
<텔미썸딩>(99) 제작부
<단적비연수>(2000)제작부
<오버 더 레인보우>(2002) 제작부장
<태극기 휘날리며> 제작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