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지아 작가의 <풍성>이 원작이다. 2009년 중국영화로 제작되어 2013년 <바람의 소리>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을 한 바 있는데 <독전>에 이은 또 한번의 리메이크라고 봐도 될까.
=리메이크는 아니다. 2009년에 나온 영화와는 거의 관계없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일단 이야기가 내게 자극과 영감을 주지 못했다. 원작 소설은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밀실 추리극을 전형적으로 따르고 있는데, <독전>에서 이미 ‘이 선생’이 누구인지 찾는 이야기를 해봤기 때문에 다시 ‘유령’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거절을 하고 강변도로를 달리는 도중 문득 발상의 전환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령이 누군지 찾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유령의 시점에서 출발한다면 그 안에서 얽히고설킨 상황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밀실 추리라는 틀 자체를 부수고 나오는 걸 해보고 싶었다. 시원하게 다 깨부수고 나와서 맞이하는 찬란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관점에서 시작하니 순식간에 구성이 만들어졌고, 거꾸로 제안을 했다.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제작 과정이 유난히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박소담 배우가 우는 걸 보고 나도 순간 감정이 복받쳐서. (웃음) 간담회 때도 말했지만 이렇게 공개할 수 있는 지금이 영광의 순간인 것 같다. 쉬운 현장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번은 정말 감회가 남다르다. 프리프로덕션부터 시나리오까지는 일사천리로 순조로웠다. 막상 캐스팅을 하고 제작하려고 했을 때 난관에 부딪혔다. 우선 일제강점기를 많이 찍는 한국의 합천 세트가 아니라 <밀정>과 <암살>을 찍은 상하이 세트에서 진행하려 했는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무산됐다. 같은 이유로 코로나 때문에 캐스팅에도 난항을 겪었다. 몇몇 일본 배우와 연결이 됐지만 최종적으로는 함께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경호대장 다카하라 카이토 역의 박해수 배우는 우리 영화의 수호천사 같은 존재였다. 촉박한 일정에 100% 일본어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주었다.
조선총독부 통신과 수신원 박차경 역의 이하늬 배우를 두고 “백지에 이하늬를 썼더니 유령이 되었다”고 극찬했다.
=맞다. 처음 시작이 박차경이었고 이하늬 배우 외에 생각해본 적이 없다. 대체 불가능한 역할이었고 이하늬 배우가 거절했다면 시작도 못했을 거다. 박차경은 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잘한 흔들림 없이 담대하게 나아가는 사람. 곱고 곧고 단단해서 사소한 일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 인물. 내게는 이하늬 배우가 그런 이미지였다. 박차경의 자존감을 표현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처음부터 이하늬와 박차경은 분리된 적이 없다.
박차경의 자존감은 총독부 정무총감의 직속 비서인 유리코 역의 박소담과 절묘한 콤비를 이룬다.
=박소담 배우와는 두 번째인데 캐스팅할 때 “미친 여자 역할 한번 해볼래?”라고 권했다. 유리코는 폭주하는 에너지로 가득 찬 인물이다. 참지 않고 화를 발산하는 뾰족한 성격이다. 기존의 이미지와 거꾸로 가보고 싶었다. 박소담 배우는 차분하고 약간 저음에 가라앉아 있는 이미지인데 그걸 뒤집은 거다. 박차경도 마찬가지다. 이하늬 배우의 기존 이미지는 발랄하고 화사한 쪽에 가까운데, 박차경은 단단하고 묵직하고 무겁다. 기존의 익숙한 것들을 뒤집는 데 즐거움을 느끼는 편이다. 암호 해독의 스페셜리스트 천 계장 역의 서현우도 같은 맥락이었다. 약간은 코믹한, 스테레오타입의 캐스팅을 한다면 쉬운 선택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의외의 면모와 복합적인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는 얼굴이 필요했기에 서현우 배우를 원했다. 캐스팅을 생각할 당시 한창 다이어트 중인 상태였던지라 포기할까 했는데 마침 <헤어질 결심>에서 살을 찌운 역할로 나온다고 하길래 서둘러 제안했다. 박찬욱 감독님이 만들어주신 환상의 타이밍이었다. (웃음)
설경구 배우가 맡은 무라야마 쥰지는 출세가도에서 밀려난 경무국 소속 감독관이자 카이토의 라이벌이다. 얼핏 유령을 잡아 다시 군으로 복귀하려는 야심을 지닌 인물이지만 속내는 훨씬 복잡하다.
=이하늬 배우가 출발점이었다면 설경구 배우는 결승골이었다. 설득을 위해 정말 공들였고 온 우주의 에너지가 모여 선배님과 함께할 수 있었다. 쥰지는 워낙에 사연이 복합적이고 두터운 인물이라 관객이 보자마자 믿고 따라갈 수 있는, 감히 의심하기 힘든 배우가 필요했다. 선천적인 결핍도 필요하고 시대상을 압축한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다른 역할들과 마찬가지로 익숙함에 기대지 않고 의외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다. 쉽지 않았지만 완성된 화면을 보니 결국에는 옳은 방향이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영화 전체가 익숙함과 클리세를 적극적으로 부수는 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밀실 첩보극인가 싶더니 후반부는 완전히 내달리는 액션 누아르물이다.
=항상 나를 자극하고 영감을 주는 불씨에 이끌린다. 영화라는 게 몇년을 송두리째 가져다 바치는 작업이다보니 늘 이성적인 판단과 계산이 필요하지만 그런 걸 다 떠나 나를 사로잡는 결정적 요소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번에는 밀실을 부수고 나온다는 설정이 그랬다. 좁고 갑갑한 곳에서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을 다 부술 때 나오는 쾌감을 그리고 싶었다. 그게 시대의 억압일 수도 있고 장르적인 관습일 수도 있는데 핵심은 깨부수는 동작, 그러니까 액션으로 이어지는 호흡과 당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