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회 칸국제영화제 최고의 영예인 황금종려상은 <피아니스트>의 로만 폴란스키(69)에게 돌아갔다. <피아니스트>는 나치 점령 당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숨어 지내다 독일 장교의 도움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유대인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브 스필만(1911∼2000)의 회고록을 기초로 만든 영화다. 그 자신 나치 치하의 폴란드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인 폴란스키는 이번 작품에선 바르샤바 게토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폴란스키는 나치의 잔학상과 더불어 한계생존지역에서 유대 겨레가 얼마나 비참하고 비열해졌는지에 대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예술은커녕 생존조차 위협당하는 한 음악가의 정신적 고통의 무게가 영화 전편을 지배한다. 폐허가 된 집에서 뽀얗게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아 차마 건반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림자 연주’에 만족해야 하는 장면이 그런 대목이다. <비터문> <죽음과 소녀> 등 폴란스키의 영화에서 ‘고립’은 일쑤 주인공을 의심과 광기로 몰아간다. 그러나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는 절망의 폐허 안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45)의 <과거가 없는 사람>은, 시골 기차 역 앞에서 노상강도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 뒤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집 주소나 직업, 이름 등 모든 걸 완전히 잊어먹은 사내(마르쿠 펠톨라)는 구세군 공동체의 도움으로 겨우 다시 삶을 추슬러간다. 취업상담소, 경찰서, 은행 등 그가 찾아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지만, 남자는 자신을 설명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 이를 통해 감독은 과연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 세상에서 뿌리뽑힌 사람들의 절망과 슬픔을 해학적으로 그려온 아키의 보헤미안적인 감수성은 이번 작품에서도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르마 역을 맡은 카티 오티넨은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임권택 감독과 더불어 감독상을 공동수상한 폴 토머스 앤더슨(32)의 <펀치 드렁크 러브>는 황량한 현대도시의 비틀린 욕망을 드러낸 <부기나이트>와 <매그놀리아>의 연장선상에 있다. 자동차 부품을 공급하는 자영업에 성공한 배리(애덤 샌들러)는 일곱 명의 누이에 둘러싸여 있다. 이들 때문에 배리는 도무지 이성에 마음을 열어놓지 못한다. 배리의 사무실 옆 도로를 고속으로 달리던 차량이 한바퀴 공중제비를 돌더니 풍금을 내려놓고 달아나면서 변화는 나타난다. 그날 배리는 그날 어딘가 신비스러워 보이는 여인 레나(에밀리 왓슨)를 만난다. 왜곡된 욕망에 지배당하는 현대인의 사막같은 내면을 건조하지만 애정어린 눈으로 잡아냈다. <스위트 식스틴>의 시나리오를 쓴 폴 레버티에게 각본상이 주어진 건 누가 봐도 적절한 선택일 것이다. 유럽을 대표하는 좌파감독 켄 로치의 근작 <칼라의 노래>(1996), <내 이름은 조>(1998), <빵과 장미>(2000)에 이어 <스위트…>에서 네 번째 호흡을 맞춘 레버티는 집필에 앞서 조사와 사례 수집을 가장 우선시하는 사실주의자다. 글래스고 출신의 인권변호사인 레버티는 이번 작품을 위해 수천 명의 십대들과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고 그들의 언어를 배웠다고 한다.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팔레스타인 감독 엘리아 술레이만(42)의 <야돈 일라헤이야>는 이스라엘이라는 군사대국의 폭정 아래 살아가야 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현실을 코미디와 팬터지로 그려낸 수작이다. 대사 없이 상황만 보여줌으로써 웃음을 선사하는 단편들은, (감독 자신은 기자회견에서 부인했지만) 프랑스의 천재 감독 자크 타티의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황금종려상 : <피아니스트>의 로만 폴란스키 감독심사위원 대상 : <과거가 없는 남자>의 아키 카우리스마키심사위원상 : <야돈 일라헤이야>의 엘리아 술레이만감독상 : <취화선>의 임권택, <펀치 드렁크 러브>의 폴 토머스 앤더슨각본상 : <스위트 식스틴>의 폴 레버티여우주연상 : <과거가 없는 남자>의 카티 오티넨남우주연상 : <아들>의 올리비에 구르메칸 55돌 기념 특별상 : <볼링 포 콜럼바인>의 마이클 무어황금카메라상 : <바닷가>의 줄리 로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