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는 우리 영화계의 독보적인 존재다. 대중에게 그의 이름을 처음 알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최근작 <생활의 발견>에 이르기까지, 생활세계에 존재하는 뼈아픈 모순들을 캐내는 그의 시선은 누구보다도 날카롭고 철저해왔다. 물론 첫 작품의 심각함이 최근작에 오면 좀 느슨해지긴 하지만 작가적인 추구의 일관성이나 영화 붙이는 스타일의 독특함으로 봐서 그만한 성과를 낸 감독이 어디 또 있을까 싶다. 한국영화계는 그나 배용균 같은 이름을 어, 하는 사이에 어부지리로 얻곤 한다.
홍상수는 음악을 쓰는 일에 매우 인색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최근작 <생활의 발견>에는 엔딩 스크롤이 올라갈 때 딱 한곡, 음악이 들어간다. <오! 수정>에서도 여주인공이 풍금으로 치는 <빠삐용>의 테마를 빼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곡은 한곡이다. <강원도의 힘>에서도 영화의 앞뒤에 등장하는 딱 한곡만이 기억에 남는다. 비교적 음악이 많이 등장하는 <돼지가…>에서도 메인 테마와 더불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신경증적인 선율, 그리고 몇곡의 선곡된 팝송들이 다다.
이렇게 인색하게 음악을 쓰는 그의 영화에 <돼지가…>와 <오! 수정>의 두편에서 음악을 만들어주었던 옥길성 교수가 사재를 털어 음반을 낸 것이 눈에 띈다. 영어로는 <Journey into Shadowland>, 한글로는 <맨발로 하늘을 걷다>로 명명된 이번 음반은 물론 O.S.T 모음집 성격의 음반은 아니다. 그는 음반 재킷에서 “20세기 클래식 창작 음악은 학술적인 상아탑 속에 스스로 갇혀서 지나친 자기도취로 심한 자폐증을 앓는 사이에 보편적 정서와 너무 멀어져”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는 이번 앨범에 현대적인 클래식과 잃어버린 보편적 정서를 되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음악들을 담고자 했을 것이다. 앨범에는 또 ‘뉴에이지 클래시컬 음악’이라는 문구도 보인다. 다른 반주들과 복잡한 편곡들을 배제한 채 하프와 피아노 독주곡들로 앨범 전체가 구성되어 있는데, 그 악기들이 내는 맑고 청명한 음색과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분위기는 분명 뉴에이지의 어떤 면과 닿아 있다.
그러나 보통의 뉴에이지와는 약간 성격이 다르다. 뉴에이지는 음악적인 개념 규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고방식인데, 이 앨범에서 특별히 뉴에이지적인 사고방식, 다시 말해 개별성의 추구나 자연친화적 제스처 같은 것들이 관념화되어 있는 걸 발견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오히려 더 정이 간다. 그의 소품들은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옥길성 특유의 소탈한 주제를 미니멀하게 반복시키면서 우리의 귀에 좀더 솔직하게 다가온다.
<마지막 열차>에서 출발하여 <강따라 바람따라>로 끝나는 이 소품들의 여행 속에는 <오! 수정>의 테마곡도 들어 있다. 영화에서는 일부러 그런 듯 투박한 피아노 솜씨로 녹음되어 들렸던 그 테마가 이 음반에서는 청아한 하프로 연주된다. 하프로 들으니 그 테마가 참 단순하면서도 좋은 멜로디를 지니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현재 경희대학교 음대 교수로 있는 옥길성은 그동안 홍상수의 두 작품과 함께 <마요네즈>에서도 음악을 담당한 바 있다. 음반에는 빠져 있지만 음열주의적 불협화음이 인상깊었던 <돼지가…>의 현악 사중주곡들은 한국 영화음악사에서 하나의 발견이었다. 그해에 몇개의 상을 타기도 했던 그 음악과 더불어, <돼지가…>는 시퀀스와 포즈, 빛과 심연을 붙여나가는 알랭 레네식 화법의 어떤 부분을 닮은 심각한 생활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