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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시집<오라, 거짓 사랑아>와 김경미시집<쉬잇, 나의 세컨드는>
2002-01-24

뒤늦은 누님과 누이 사이

문정희는 나보다 6살인가 연상이다. 강태형(시인·<문학동네> 대표>이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라고 문정희를 소개해준 것이 80년대 초였으니 그녀를 만난 지 20년이 꽉 차간다. 그녀가 노래 <그날이 오면>으로 20년 이상 나를 감동시키고 있는 작곡가 문승현의 고모라는 것을 알게 된 건 한참 지나서였다. 그럼. 그렇다니까? … 어허, 저런, 저런 …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었다.

어쨌거나, 그랬지만, 그뒤 나는 그녀의 시를 찾아 읽지는 않았다.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만날 때마다 풍기는 압도적인, 육감보다 더 생애적(生涯的)인 인간감(人間感)에 질린 까닭이다. 그랬는데, 그녀가 보내 온 시집 첫장을 펼치니, 놀라워라, 내용과 기법, 소통과 품격 에 두루 걸쳐 ‘더도 덜도 말고’라는 표현에 딱 알맞은 시 한편이 있다.

내가 만난 모든 장미에는/ 가시가 있었다/ 먹이를 물고 보면 거기에는 또/ 어김없이 낚싯바늘이 들어 있었다/ 안락하고 즐거운 나의 집 속에/ 무덤이 또한 들어 있었다/ …(중략)/ 사랑도 깊이들어가 보면/ 짐승이 날뛰고 있었다/ …(중략)/ 내가 가는 길/ 그래도 나는 시 몇 편을/ 통행세로 바치고 싶다(13쪽, ‘통행세’)

김경미는 팔뚝 핏줄 불끈 서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절 예쁘고 시 잘 쓰는, 그래서 총각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시인이다. 나보다 5살 어리다. 키 꺼정하고 얼굴 훨친한 고광헌(시인·한겨레신문사 체육부장)이 그녀를 ‘백주에 채갔’을 때 경악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를 느꼈던 집단적 경험은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어쨌거나, 그뒤 그녀와 그녀의 시를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소식도 시도, 끊긴 것에 가까웠다. 그러던 그녀가 작년 문학동네 망년회 자리에서 시집 한권을 몰래(?) 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도 ‘더도 덜도 말고’가 있다. 꿈의 배경이 또 어둡다. 먹지 씌워/ 베껴낸 저녁 어스름/ 삶의 한 마음은 언제나 거기에 가 있으니// 왜 행복이 두려웠는지를 생각해보면/ 거기 쓸쓸함이 없어서였음을/ …(중략)/ 그 걸음에 쓸쓸해하는 게 이젠/ 욕되지도 성급하지도 않은/ 또 저녁이다(85쪽, ‘저녁’)

‘누님의 거울’(‘국화 옆에서’)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정주가 지난해에 죽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위 시에서 그 ‘누님’의 육성을 비로소 듣는 듯하다. 두 시집을 가장 가까운 책꽂이에 모시고나니 ‘누님’과 ‘누이’ 사이에 있는 듯, 뒤늦게 부끄리듯 행복하다.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