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 위민 원트> O.S.T / 소니뮤직 발매
이 영화에서 멜 깁슨은 전깃불에 두방 감전되고 나서 여성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일종의 초능력을 부여받는다. 더러운 속물에 여성 폄하자이자 바람둥이였던 그는 그 과정을 겪고 여성 옹호자가 된다. 그리고 나서 영화는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악몽에서 깨어나듯 멜 깁슨을 보통사람으로 복귀시킨다. 이미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이런 식의 스토리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리라고는 아마 영화를 만든 사람들조차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그렇고 그런 드라마로 멜 깁슨 팬들의 돈을 좀 긁어보려는 수작으로밖에는 안 보인다. 두 주인공의 캐릭터도 진부하다. 여전히 마초/열혈 직업여성의 이분법이다.
그런데 이런 스토리에 비해 음악의 사용은 비교적 흥미롭다. 우선 멜 깁슨을 대표하는 음악은 프랭크 시나트라다. 그의 미국식 스탠다드 가요는 미국 남성의 전세계적인 전성기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한국전쟁을 전후로하는 팍스아메리카나. 그 시기는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전성기와도 겹친다. 그 전성기에 만들어진 스타일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랑은 비를 타고> 같은 뮤지컬영화. 지금 봐도 당시의 스튜디오 규모와 물량이 상상이 안 갈 정도로 방대하게 느껴지는 신들이 많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I Won’t Dance]를 틀어 놓고 멜 깁슨은 그 뮤지컬의 주인공 흉내를 낸다. 그 당시의 미국 플레이보이가 여자 꼬실 때 틀어놓으면 딱 좋았을 만한 노래다. 그 구닥다리 ‘스탠다드’에 대한 미국 남자들의 처절한 향수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리라. 이미 그건 시대착오적이다.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멜 깁슨은 스타킹을 신고 매니큐어를 발랐으며 다리털 제거용 왁스를 바른 뒤 다리에 패드를 대고 있다. 그가 하는 광고일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갑자기 프랭크 시나트라를 끄더니 “이 음악으론 안 돼” 하면서 메레디스 브룩스의 <비치>를 틀어놓는다. 딸의 음반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LP로 틀더니 메레디스 브룩스 것은 CD로 트는 장면도 잊지 않고 넣었다. 이 노래는 직역을 하자면 ‘그래 나는 쌍년이다 어쩔래’ 하는 가사를 가진 노래다. 전투적이긴 하지만 상투적이기도 하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 노래에 의해 완전히 조롱받는다. 그때 딸이 들어온다. 딸은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와 살고 있다. 딸은 아버지를 사람취급하지 않는다. 왜 남의 음반을 몰래 꺼내 틀었느냐고 아버지를 혼내는 딸과 ‘저, 저…’ 하며 머뭇거리는 아빠.
이 영화는 아주 쉽게, 그런 방식으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위기 상황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심각한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실용적’으로 대처한다. 여성 옹호자가 되는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를 땅에 묻어라.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영화를 통해서는 감전되는 길밖에 없다. 후후. 한심한 할리우드의 상상력….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영화 음악에 관심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한 장면이 눈에 띈다. 두 주인공이 조용한 장소에서 춤을 추려할 때, 창 밖 어디선가 템프테이션스의 고전인 [Night and Day]가 흘러나온다. 둘은 창가로 다가간다. 남자주인공이 “볼륨을 높입시다” 하면서 창문을 조금 더 연다. 노래소리는 커진다. 이윽고 둘은 사랑의 춤을 춘다. 그러자 어느새 음악은 마치 실내에서 틀어놓은 음악처럼 화면 전체를 꽉 채운다. 그 일련의 과정은 영화의 사운드가 얼마나 속임수인지 잘 알려준다. 사운드트랙을 만지는 기사는 처음에는 필터링을 했다가, 필터를 빼고, 다음으로는 볼륨을 높이면 그만이다. 그런데 주인공들은 창가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게 영화의 본질이다. 그때 여자주인공은 내가 들어본 가장 영화다운 거짓말에 속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친다. “어디서 저 노래가 나오는 거죠?”
성기완 /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