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방>은 실내의 영화이면서 길의 영화이다. 이 영화가 비추는 ‘실내’는 담담하고 리얼하며 과장된 것이 없다. 지나치게 ‘실내’여서 그것은 겸손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길에서 시작되지만(조깅), 이내 실내로 잠입한다. 그러고나서 다시 실내에서 빠져나와 길을 거쳐 바다에 이르는 마음의 움직임을 그려내고 있는데, 음악 역시 그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사실 음악도 이렇다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렇다할 것이 없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이다. ‘이렇다할 것이 없음’ 내부에는 일상의 광기가 있다. 반면에 아들의 죽음이 불러오는 광기의 파장 안에는 또 ‘이렇다할 것이 없음’이 있다. 이렇다할 것이 없음과 광기의 안팎 엮임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담담함이 의도하고 있는 바다. 음악은 그 ‘이렇다할 것이 없음’을 알려주는 선에서 역할을 자제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독특한 전통 속에 있는 영화라는 걸 어렴풋이 감지한다. <아들의 방>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흔적, 그 자존심이랄까, 뭐 그 비슷한 것의 그림자를 본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이 영화가 올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탔다면, 그 상은 바로 이 자존심에 주어진 것일까. 이 영화는 영화가 현실을 담아낼 때 어떻게 현실을 왜곡하느냐에 관한 자문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왜곡을 최대한 피해보자는 굳은 결심 비슷한 걸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이 영화는 좌파영화이다. 대개 그 ‘굳은 결심’은, 음악의 사용에 관해서 가혹하게 작용한다. 나와 누군가가 사랑한다고 쳐보자. 아름다운 날, 둘이 예쁜 벤치에 앉아 뽀뽀를 하는데 허공에서 음악이 울리나?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그렇게 음악이 울린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것에 관해 의심하지 않을 만큼 드라마와 음악의 극적 연계를 꾀해온 역사가 깊은 것이고, 그만큼 우리는 영화라는 허구의 관습에 길들여져 있다. 차라리 이 영화는 그런 관습에 관한 영화이다.
그렇다고 음악이 세심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니콜라 피오바니가 맡은 음악은 단순하고 평범한 듯 보이는 가운데 절제력과 응집력을 발휘하고 있다. 처음의 조깅장면에서는 상당히 경쾌하게 시작하다가 점차 영화가 슬퍼지면서 슬픔에 빠진 가족들의 마음을 달래듯 차분하게 흐르는 단조의 선율이 섬세하게 느껴진다. 물론 과도하게 감상적으로 흘러 눈물을 유도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피오바니의 음악 이외에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브 역할을 하고 있는 노래가 하나 있으니 다름 아닌 브라이언 이노의 <강가에서>(By This River). 브라이언 이노는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영미 팝의 대가이다. 그는 70년대 이후 영미 팝의 역사를 주도한 가장 중요한 뮤지션/프로듀서의 하나로 꼽힌다. <강가에서>는 리듬 악기가 빠져 있는 단순하고 강렬한 노래이다. 이 노래에 관해서는 난니 모레티 감독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인용하는 것으로 족할 것 같다. “죽은 아들에게 음반을 사는 신을 구상할 때 이 노래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그리고 이 노래가 영화 마지막을 장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가사를 번역하게 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노래가 영화와 너무 잘 맞았다.”
노래 역시 사주팔자를 타고난다. 훌륭한 노래는 음반 속 깊이 잠들어 있다가 어느 때 다시 세상의 감정과 합일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강가에 서 있네… 우리가 여기 왜 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 이 노래 역시 ‘이렇다할 것이 없음’의 깊이를 보여준다.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