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도, 나이테가 쌓일수록 밴드의 음악은 달라진다. 그러니까 어쩌면 기억에 남는 색을 보였던 밴드의 신보를 기다리게 되는 건, 귀에 익은 그들의 인장을 확인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이를 거스르지 않는 변화를 기대하는 이율배반의 과정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델리 스파이스의 <D>는 꽤 영민해보이는 음반이다. 더없이 서정적으로 청각을 파고드는 세련된 선율, 열창이나 화려한 기교없이 절제된 담백한 미성, 너무 무겁지 않고 울림이 많은 기타 사운드와 소소한 일상의 풍경, 그리고 내밀한 우울함의 정서를 드러내는 가사. 어느덧 6년의 시간을 쌓아온 델리 스파이스 특유의 색을 여전히 담고 있어 낯설지 않다.
그럼에도 <D>가 익숙한 것처럼 들려주는 음악은, 사실 델리 스파이스의 음반 중에서 가장 다채롭기도 하다. 유난히 경쾌함이 튀어오르는 첫곡 <뚜빠뚜빠띠>, 연인에 대한 낙관적인 기다림을 노래한 <항상 엔진을 켜둘께>는 특유의 담백한 보컬과 단순하고 팝적인 선율을 강조한 모던록 스타일로 낯설지 않은 음악세계로의 문을 연다. 그런데 세 번째 곡 <안녕 비밀의 계곡>부터 어딘가 색다르다. 1집의 <가면>이나 3집의 <달려라 자전거> 등 윤준호의 가늘고 발랄한 음색과 동화적인 일상 스케치는 여전하지만, ‘빰빠빰빠빠’ 하고 흘러나오는 금관악기의 전주 덕분이다. 트럼펫과 트롬본 등 금관악기가 사운드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게 된 것은, 이번 신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음악적 변화라 할 수 있다. 3집까지 기타와 함께 주된 선율을 담당해온 키보드의 양용준이 빠지면서 기타에 김민규, 베이스에 윤준호, 드럼에 최재혁의 3인조로 줄어든 때문이기도 하다.
다소 블루지하게 울리는 기타와 함께 복고풍으로 느껴지는 <Doxer> 등 기타와 베이스, 드럼의 선율과 음색 사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는 브라스의 사운드는 전체적인 소리의 층을 좀더 풍성하게 하는 만큼, 이질적인 질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단순히 악기의 구성뿐 아니라 셔플 리듬을 차용한다거나 <낯선 아침>처럼 장중하고 때로 현란한 구성을 들려주는 아트록 분위기까지, 낯익은 음악 사이로 새로움을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는 테크노와 전자음악을 활용한 시도가 두드러졌던 3집과 또다른 실험이다.
그 밖에 유난히 나른하고 몽환적인 울림이 깊은 <Still Falls The Rain>이나 <천사들의 자장가>처럼 김민규의 솔로 프로젝트 스위트피에 가까운 감성까지, 들을수록 여러 질감의 델리 스파이스가 <D>에서 발견된다. 단순하면서도 감성적인 선율로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주문처럼 반복하던 초기의 풋풋한 생기는, 어느덧 매끈하고 세련된 음악으로 익어 있다. 혹자는 ‘대중적으로 변했다’고 할 테고, 혹자는 ‘성숙했다’고 하겠지만. 다만 PC통신에서 홍익대 앞 라이브클럽으로, (이제는 경계가 흐려졌지만) 다시 ‘비인디’음반사를 거치며 소극장과 공연장으로 꾸준히 걸어나온 이들이, 좀더 많은 청중과 오래도록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중이라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알파벳의 네 번째 글자이자 델리 스파이스의 첫 이니셜인 <D>는, 아마 ‘네 번째 시작’쯤 되는 게 아닐까. “이건 겨우 시작일 뿐/ 니 앞길에 축복을”이라는 <천사의 자장가>의 가사대로 빌려주면 좋을. 1년 반 만에 새로운 초대장을 건네온 이들은, 오는 11월9∼11일 3일간 대학로 라이브극장에서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문의: 02-3141-9450∼1).
황혜림 blaue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