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처럼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어울리는 시기도 없을 것이다. 집에서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기에는 너무 갑갑한 계절, 큰 화면에 흠뻑 빠져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도 훌륭한 피서법일 것이다. 하지만 보통 한 시즌에 개봉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4∼5편이 고작이다. 이러한 결핍 현상을 상쇄해주는 것이 여름을 전후로 열리는 각종 영화 관련 페스티벌에서 상영되는 해외 초청 애니메이션들이다.
올해로 5회째를 맞이하는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의 개막작으로 상영되는 <메트로폴리스>는 일본만화의 ‘신’(神)으로 추앙받고 있는 ‘데즈카 오사무’의 원작에 <캡틴 하록>, 그리고 최근작으로 피터 정이 캐릭터 디자인을 했던 한·미·일 합작 애니메이션 <알렉산더> 등을 맡으며 빼어난 공간감과 영상미를 만들어온 ‘린타로’ 감독에 <아키라> <메모리스>를 제작한 ‘천재’ ‘오토모 가쓰히로’의 각본, <꼬깔모자 심총사> <천사의 알> 등에서 작품의 몽환적 이미지를 충분히 살렸던 ‘나쿠라 야스히로’의 캐릭터 디자인 등 프로젝트가 시동을 걸 때부터 화제가 됐던 스탭들의 네임밸류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메트로폴리스>는 거대한 권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더 큰 권력을 탐하는 ‘레드공’과 그가 세계정복의 도구이자 지배자로서 창조시킨, 죽은 딸의 모습을 한 인조인간 ‘티마’, ‘레드공’에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지만 그가 애정을 보이는 티마의 목숨을 계속 노리는 ‘로크’, 그리고 티마가 처음으로 만난 인간으로 부모이자 스승 같은 ‘켄이치’라는 4명의 주연급 캐릭터들이 펼치는 애증의 드라마 속에 인류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일본의 최신 애니메이션 제작기술과 그들이 어릴 적부터 봤고, 정신의 근저에 깔려 있는 만화에 대한 인식을 상당부분 맛볼 수 있는 작품으로 단순히 그래픽만 현란한 애니메이션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인조인간 ‘티마’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는 캐릭터다. 1949년에 발표된 원작만화에서는 ‘미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캐릭터는, 이후 52년작 <철완 아톰>의 주인공 ‘아톰’으로 대변되는 데즈카 오사무의 인간형 로봇 캐릭터의 출발점으로 알려져 있으며, (재미있는 사실은 아톰의 로봇엄마의 이름도 ‘미치’다) 원작에서는 ‘양성체’로 설정돼 있어 후일 순정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남장여자 캐릭터들의 발단이 된 <리본의 기사>의 ‘사파이어 왕자’(실은 공주)의 본원지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성 정체성’과 ‘가족제도’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여겨져 말하는 것조차 터부시돼오던 ‘동성애’나 ‘트랜스젠더’(성전환)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는 최근에 더 되새겨볼 만하다. 지금의 이러한 분위기에는 <베르사유의 장미>의 ‘오스칼’(남장여자)이나 <여기는 그린우드>의 ‘키사라기 ’(여장남자), <란마 1/2>의 ‘사오토메 란마’(양성) 등의 인기만화 캐릭터나 여성독자를 중심으로 최근 퍼져나간, ‘야오이’라 불리는 동성애만화들처럼 다른 어떠한 매체보다도 쉽게 ‘반전된 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만화의 영향도 무시는 못할 것이다.
골프스타 ‘우즈’가 부자라고 미국에서 흑인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듯, 국내 모트랜스젠더 연예인이 인기를 끈다고 해서 유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이들의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닐 것이다. ‘터부’라는 암묵적인 계율은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심’마저 닫아버리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온갖 일들을 다 해주는 기계가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