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 이름을 보니 우리나라 사람 같은데 왜 별도의 번역자가 있을까? 조선의 선비가 한문으로 쓴 산문을 번역한 책인가? 서경식(1951∼)은 일제의 식민 지배 탓에 일본 땅에서 태어난 우리 민족의 한 사람으로, 재일한인 차별정책 때문에 충분한 민족어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한다. 서경식이 이 책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을 때 주요 수상 이유는 ‘빼어난 일본어 표현’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글로 쓴 책도 아니라 한인(韓人)이 다른 나라말로 쓴 저서를 번역한 책을 읽을 기회는 자주 있는 게 아니다. 그 한인의 이름에 따라붙는 수식어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정치범 서승, 서준식 형제의 동생’이고 보면 더욱 흔치 않은 기회다. 더구나 이 책은 우리가 ‘김구와 이순신을 읽는 동안 다자이 오사무와 데라다 도리히코를 읽을 수밖에 없었던’ 서경식의 어린 시절 독서 체험 기록이 아니겠는가.
모국어를 상실한 게 아니라 모국어 자체가 주어져 있지 않았던 ‘경계인’의 독서 체험이고보니 그 목록에는 우리도 익히 아는 세계 명작 혹은 고전들과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일본 책들이 섞여 있다. 어린 소년 시절에는 <삼국지>가 있는가 하면 에리히 케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 쥘 베른의 모험소설도 있다. 그리고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에는 루쉰의 <고향>,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도 있고 1940년에 나온 일역 <조선 시집>도 있다.
그의 이러한 독서 편력은 유년이라는 알에서 깨어나 자아와 세계의 불화를 몸과 마음으로 치열하게 앓게 되는 한 정신의 내밀한 편력기 그 자체다. <조선 시집>을 해설한 일본인들은 ‘조선 시인들이 바야흐로 폐멸하려는 언어를 통해 제 백성들에게 최후의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적었다. 조선어를 모르는 그가 일역된 조선 시를 읽으며 그런 식의 해설, 즉 시의 수준은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시의 언어는 부정하는 해설을 접했을 때의 감정이 어떠했겠는가?
독서라는 말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날렵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이 책은 그런 가벼움과 날렵함에 익숙해져버린 나 같은 사람에게 무거운 추를 더하게 만든다. 같은 저자가 쓴 미술 이야기 <청춘의 사신>(김석희 옮김/ 창비 펴냄), <나의 서양미술 순례>(박이엽 옮김/ 창비 펴냄) 등을 새삼 다시 펴들게 된다.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돌베개 펴냄]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