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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신성남성제국의 종교
2001-06-21

쾌락의 급소 찾기 33 - 가장 남성적인 욕망의 만화는?

만화도 그렇다. 어떤 만화들은 군살 없는 몸매와 소박한 옷차림으로 다가와 상쾌한 향기를 전해주고 사라진다. 허영만의 <사랑해> 같은 작품이다. 보기에도 부담없고 본 뒤에도 뒤끝이 없다. 그렇지만 왠지 민숭민숭할 때도 없지 않다. 어떤 만화는 너무 수다스럽다. 주인공들의 대사는 빈칸을 찾지 못해 안달이다. 많은 열혈개그만화들이 그러하다. 그런데 오늘 만나게 될 만화들은 더욱 버겁다. 이 육체파의 만화들은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무서운 에너지로 달려온다. 그 집요한 욕망은 때론 공포를 자아내기도 한다.

최근 국내에 발간돼 나온 <마징가 Z> <게타 로보> 등의 고전만화를 보면 나가이 고라는 만화가가 얼마나 인간의 욕망에 집요하게 매달려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원래 <파렴치 학원>이라는 학원개그만화에서 몰상식한 학생과 선생들이 벌이는 변태 대결로 악명이 높았던 만화가. 그림체는 어리숙했지만, 동시대의 ‘소년’ 독자들이 ‘한번 해봤으면’ 싶은 나쁜 짓거리를 매우 영리하게 그려나갔다.

막연하게 정의의 로봇이라는 향수로 <마징가 Z>의 만화책을 다시 쥐어본 성인 독자들도, 왠지 가슴이 뜨끔한 것을 느끼리라. 지금 봐서도 제법 과격한 살인장면과 느닷없는 벗기기 장면들이 줄을 잇는다. 나가이는 ‘자동차처럼 타고 달릴 수 있는’ 로봇으로 <마징가 Z>를 만들어냈고, 운전 면허도 없는 소년소녀 주인공들이 그 로봇을 타고 합법적으로 건물을 부수고 악당을 살해한다. 나아가 <데빌맨>에서는 악마와 합체한 인간소년이 그 악의 힘으로 인간을 지켜낸다는, 완벽한 신성모독의 세계를 열어보이기도 했다.

극단적 남성판타지, 법도 도덕도 없는

섹스와 폭력을 신성시하는 남성만화는 그 독자층을 점점 높이면서 더욱 그 강도를 더해갔다. <공작왕>이나 <북두신권> 같은 만화들은 완벽한 욕망의 배설 쇼를 벌이기 위해, 치외법권의 지역으로 서버를 옮겼다. <공작왕>은 동서고금의 귀신과 괴물들을 총출동시키며 그들에 의해 벌어지는 잔혹상을 즐기고, 또한 그에 맞서는 주인공들에게 정의로운 파괴 행동을 허락했다. 3류 포르노 배우의 교태로 유혹하는 여자와 ‘안아줘 아버지’라는 근친상간의 묘사까지 ‘귀신 들렸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용인한다. ‘퇴마(退魔)의 링’이 그들의 데스매치를 합법화하고 있는 것이다.

<북두신권>은 파국의 폐허세계로 무대를 옮겨, 그곳에서 분명히 있을 법한 약육강식의 폭력과 동물적인 섹스를 열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가공할 덩치와 무자비한 폭력성의 괴물들이 등장해 그 전투의 강도를 더욱 높여준다. 이와 같은 남성 세기말 판타지는 정말 표현과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과격한 묘사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비교적 최근작인 <전략 인간 병기, 카쿠고>는 이미 너무 많은 자극으로 인해 마비상태에 있는 남성독자들의 중추를 뒤흔들기 위해 강렬한 ‘역겨움’을 더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거대한 여괴물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통째로 삼키고, 마음에 드는 남자의 얼굴을 입으로 찢어 젖가슴에 붙여둔다. 자신의 추함을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전투에 앞서 자신이 뼈째로 삼킨 인간들을 아랫도리에서 쏟아내기까지 한다.

<북두신권>이나 <…카쿠고>에 등장하는 파국의 세계는 기존의 도덕을 무위로 돌리고, 생존을 위한 폭력을 합법화한다. 그러나 비슷한 설정에서 출발하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사라> 등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뒤의 작품들에도 생존을 위한 격렬한 전쟁의 장면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표현은 훨씬 부드럽고, 따뜻한 동료애나 로맨스의 분위기도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여성적인, 또는 남성적인 욕망에 덜 충실한 세기말 만화인 것이다.

폭력=삶에 대한 욕망?

한편 국내의 작품인 <남자 이야기>를 들여다본다면, 역시 파국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강렬한 폭력의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에 의해 통제된 힘이다. 여러 문파들이 대결을 벌이고 내부에서도 치열한 힘의 대결이 벌어지지만, 잘 짜여진 군사조직의 일원으로서 도덕적 한계를 쉽게 넘어서지 않는다. 도덕률 자체가 보수성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내의 작품들이 일본과 비교해서 남성적 욕망의 분출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 등의 작품에서도 퇴마를 동기로 한 충분한 폭력성을 느낄 수 있고, 대량생산되는 공장제 남성만화들에서도 자극을 위한 노력은 빠뜨릴 수 없다. 문제는 그 욕망의 형상화가 얼마나 독창적이고 의미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최근 들어 남성적 욕망의 대변자로서 가장 굳건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베르세르크>의 미우라 겐타로일 것이다. <베르세르크>는 서구적 야만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중세 고딕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십자군 전쟁을 연상케 하는 끝없는 전쟁의 지옥도에서 태어난 가츠의 삶은 ‘오직 살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한 것이었다. 썩은 양수 속에서 발견된 그는 여섯살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든다. 그리고 양아버지로부터 학대받고 잔돈 몇푼에 남창 역할을 해야 하는 가혹한 시련은 그를 살인밖에 모르는 검은 전사로 만들어간다. 이후 그가 만나게 되는 악마와 인간의 성희(性戱), 천사의 탈을 쓴 초월자의 폭력적인 섹스는 어찌보면 그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으로까지 느껴진다. 탁월한 상상력으로 건설된 이 견고한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캐릭터들이 너무나 전형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가장 여성적인 욕망의 만화는 무엇일까?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