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칸> O.S.T | 유니버설 발매
왜 사람들은 멕시코를 연상하도록 하기 위해 하이 톤의 트럼펫이 단조의 멜로디를 불게 만들까? 트럼펫의 정열적인, 빨간 음색은 실제로도 강렬한 멕시코의 태양이나 매운 고추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트럼펫은 자주, 멕시코 사람들이 하는 민속적인 음악에서도 주도적인 멜로디 악기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영화에서 이러한 트럼펫 사운드는 이 악기에 얽힌 기본적이고도 음악적인 사연보다 오히려 장르적인 배경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사실 이 트럼펫은 미국도, 멕시코도 아닌 이탈리아 사람들이 만든 마카로니 웨스턴에 빚을 지고 있는 사운드이다. 사람들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비장한 느낌의 이러한 트럼펫 사운드가 ‘멕시코’로 자신을 데려다주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실은 그 사운드가 데려다주는 곳은 ‘멕시코가 배경인 서부영화’이다. 그것도 정통 서부영화가 아니라 잔인하고 싸구려스러운 마카로니 웨스턴 말이다.
브래드 피트와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멕시칸>의 메인 테마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주제가를 선도하는 트럼펫 멜로디더러 “관객을 마카로니 웨스턴의 황당무계한 내러티브로 데려가라”고 명한다. 그러나 그 톤은, 늘 그렇듯 우리에게는 ‘비장하게’ 들리지 않고 코믹하게 들린다. 그 트럼펫은 언제인가부터 우리에겐 일종의 ‘비꼼’의 상징이기도 하다. 비장한 듯이 흐르는 마카로니 웨스턴풍 트럼펫 사운드는 우리에게 ‘얼간이’가 한명 정도 등장하여 분위기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내러티브도 동시에 연상토록 해준다. 코미디 프로그램 같은 데서 하도 많이 울궈먹어서 그렇게 들리는 면도 있지만, 실은 마카로니 웨스턴의 존재 양식 자체로부터 그러한 ‘비꼼’은 유래한다. 마카로니 웨스턴의 황당무계함과 반영웅주의가 미국중심주의의 보수적 보루인 정통 웨스턴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 트럼펫은 때로 비장하지만 헛된 가짜 영웅들의 우스꽝스러운 세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몇몇 인상적인 장면을 빼고는 그렇게 감동적이지도 황당무계하지도 잔인하지도 않다. 영화가 이루어지는 두축, 즉 브래트 피트가 중심인 마카로니식의 황당무계함과 줄리아 로버츠가 중심인 미국식 사생활 고백/상담극으로 변질된 인질극이 적당하게 버무려져 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가 얼마나 ‘인구학적’으로 움직이나를 잘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는 중남미계 미국인을 겨냥하고 있다. 멕시코는 약간 지저분한 곳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신비스러운 곳으로 묘사된다. 스토리를 끌고 가는 ‘신비의 총’은 중남미 환상 문학에 등장할 법한, 애증과 환상이 얽힌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대상이다. 할리우드는 그게 진짜로 멋지거나 신비스러워서 채택하기보다는 ‘인구학적’인, 다시 말해 판매와 관련한 실용적인 배려로 차용하고 있다.
영화의 음악을 맡은 앨런 실베스트리(Allen Silvestri)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과의 협력자로 유명하다. <로맨싱 스톤> <포레스트 검프> <캐스트 어웨이> 등의 히트작에서 스코어를 담당했다. <멕시칸>의 스코어에서도 그는 수준급의 실력을 보여준다. 앞서 말한 장르적 규약들을 할리우드적인 ‘교양미’(다시 말하면 ‘뻔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재미나게 살리고 있다. O.S.T 음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상적인 뮤지션 하나는 ‘에스키벨'이다. 이 사람은 멕시코 태생인데 1950년대 후반 스테레오 사운드의 적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 실험적 뮤지션이다. 그러나 그의 실험성은 1990년대에 가서야, 특히 라운지 계통의 음악이 테크노적으로 리바이벌될 무렵에야 사람들에게 이해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실험한 장르는 ‘라운지/이지 리스닝’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쉬운 장르여서 오히려 사람들이 몰라주었던 것이다! 그의 음악인 <엘 카블레>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성기완|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