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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
2002-12-18

아,거침없는 카리스마!

움직임, 목숨, 멈춤, 격렬, 주먹, 눈빛, 뜨거움, 피. 최영의 혹은 최배달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최배달은 일제시대 비행사가 되고 싶어 일본에 건너가 소년항공학교에 다니다가 미군이 진주한 뒤 야쿠자 보스의 보디가드가 되기도 했고, 입산 수련 뒤 전일본공수도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했으며, 실전공수를 내세우며 전국의 가라테 도장을 순례하며 강자를 격파하기도 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최고의 파이터들과 자웅을 겨루었으며,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 극진가라테라는 새로운 유파를 만들었던 ‘남자’다. 남자를, 여자를 운운하는 것은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20세기의 수식어처럼 보이지만, 최배달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단어는 바로 ‘남자’다. 그래서 그의 삶은 뜨겁고, 늘 목숨을 건 위기의 순간이며,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하고, 움직임과 멈춤의 앙상블을 조율해야 한다.

남성들 사로잡은 영웅의 일대기

매력적인 텍스트인 최배달의 삶은 여러 번 만화로 각색되었는데, 기억할 만한 작품은 모두 70년대에 출판되었다. 1977년 <선데이서울>의 자매지였던 <주간스포츠>에 연재된 <투혼>은 선 굵은 작화 스타일에 하드보일드한 최배달의 삶을 효율적으로 담아냈고, 고우영의 <대야망>은 고우영 특유의 화려한 필치가 빛을 발한 작품이었다.

최배달의 삶은 1989년 방학기에 의해 다시 한번 화려하게 지면을 장식했다. <애사당 홍도>(1975), <바리데기>(1977), <다모 남순이>(1979)처럼 사극을 주로 그리던 방학기는 1985년 <스포츠서울> 창간과 함께 <감격시대>를 연재하며 근현대사의 협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하드보일드 르포르타주 극화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협객, 무도인, 레슬러를 내세운 하드보일드 로포르타주 극화는 20세기 초반을 무대로 실재한 주인공들의 삶을 격정적으로 그려냈다. 70년대 <일간스포츠>가 고우영의 극화를 내세워 신문의 판매부수를 늘렸다면, 80년대 <스포츠서울>은 방학기의 극화를 내세워 판매부수를 늘렸다. 이 두 신문이 겨냥한 계층은 정치, 사회, 경제 등의 골치아픈 뉴스보다 스포츠와 연예 등을 선호하는 평범한 남성들이었다. 고우영의 극화가 초기 선 굵은 정통 사극으로 진행되다가(<임꺽정> <일지매> 등) <삼국지>를 정점으로 유머와 해학이라는 우리나라 특유의 서사적 전통과 만나 특유의 작품 세계를 완성시켰다면, 방학기는 처음부터 실재하는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작품에는 공통된 ‘영웅’이 있었다.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는 친근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카리스마가 넘쳤고, <바람의 파이터>의 최배달은 처음부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소년이었다. 이 땅의 평범한 남성 독자들은 지면을 통해 영웅을 만나기를 원했다. 70년대, 80년대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서 숨죽여 하루를 살고, 가판에서 산 스포츠신문을 보며 팍팍한 삶의 스트레스를 달래는 남성들은 늘 영웅을 갈망했다. 70년대 고우영 극화의 영웅들이 해학의 얼굴에 숨겨진 복화술이었다면, 80년대 방학기 극화의 영웅은 주먹과 발차기에 숨겨진 복화술이었다.

거칠고 힘있는 터치, 효과 만점

르포르타주 만화답게 <바람의 파이터>의 중심에는 최배달이 있다. 최배달은 처음부터 영웅적 풍모를 타고 난 사람이다. 전후 혼란기에 일본사회에 등장해 최고 고수를 하나씩 쓰러트린다는 그의 바이오그라피는 너무나 허구적인 진실이다. 일본의 부녀자를 폭행하는 미군을 혼내주던 최배달은 몰래 자신을 지켜주던 일본인 형사에게서 요시카와 에이지가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책을 소개받는다. 마구잡이로 싸움을 하던 거리의 파이터 최배달은 일본 전설의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의 전기를 보며 싸움의 요령을 배워나간다. 그리고 열 번째 방문 끝에 겨우 만난 요시카와 에이지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싸움은 “결국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최배달은 요시카와의 권유대로 산으로 들어간다.

방학기의 펜은 거칠다. 종이 위에 내지른 선은 운동을 재현하고, 힘을 실어나른다. 거친 선은 효과선이나 그림자를 표현하는 데 효율적인데, 최배달의 뒤편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의 악한들이나 최배달의 얼굴에 깔린 그림자는 거친 펜선과 함께했을 때 더욱 힘을 얻는다. 1단에 5칸이나 6칸으로 나뉘어진 작은 칸은 대화나 독백을 통해 서사를 전달하고, 결정적인 순간의 동작은 커다란 칸에 연속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번에 새롭게 출판된 <바람의 파이터>는 총 10권 분량으로 전면 재수정되어 연재 당시의 원고와 가장 가까운 상태로 복원된다. 예전에 출판된 단행본들은 세로로 긴 원고를 흐름에 신경쓰지 않고 적당히 잘라내 출판했는 데 비해, 이번 단행본은 이야기의 흐름과 연출을 최대한 고려해 작가가 직접 페이지를 나누었다. 또한 1페이지에 4단이 실리는 밀도있는 판형으로 출판되어 원작의 재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연재 당시 실렸던 광고 자리를 채우기 위해 칸을 새롭게 그리는 경우도 있어 ‘복원’에 가까운 작업을 수행했다. 연재 당시 매일 신문을 기다리던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어 행복했다. 이제 1권이 나왔다. 때마침 영화제작도 함께 발표되어 영화의 원작으로 활용되는 만화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주연이 ‘비’라던데, 글쎄 방학기 만화에 등장한 최배달의 강한 눈매를 얼마나 잘 재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원작과 전혀 다른 새로운 카리스마의 주인공이 등장할지, 아이돌 스타의 힘을 이용한 영화의 전략으로 끝날지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