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논 인버스> O.S.T/ EMI 발매
영화음악이 보통 음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없다. 영화음악도 음악이므로 음악적인 여러 원칙들을 기본적으로 적용받는다. 그러나 ‘근본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보통 음악과 현격한 차별성이 생기는 대목이 있기는 있다. 영화음악이 (당연하게도) 영상과의 조합을 통해 의미화된다는 것이다. 넓게 보아서는 보통음악도 이와 비슷한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주변의 상황과 조합되는 사운드라는 측면에서, 예를 들어 테크노, 이 장르는 보통 ‘클럽’이라는 장소와의 조합을 통해 기능한다), 영상과의 조합을 통해 보통 음악과는 다른 독특한 음악의 문법이 생긴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영상과의 조합이라는 항목은 음악적인 성격의 가장 큰 변수이므로 영화음악을 보통 음악과 완전히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게 된다. <캐논 인버스>라는 이탈리아영화에 음악을 쓴 사람은 엔니오 모리코네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영화음악가이다. 그가 음악을 썼으면 영화가 얼마나 살아날까, 하는 기대를 갖는 일이란 관객의 입장에서, 그리고 팬의 입장에서 당연하다.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아메리카>나 <시네마천국>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심금을 울려주는 그 감상적인 멜로디들이 우리의 머릿속에는 맴돌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는 기대 이하이다. 왜 기대 이하냐, 엔니오 모리코네의 멜로디가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그의 테마에도 문제는 있다. 예전의 생기가 조금 사그라들었는데 느낌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그러나 그의 음악들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만일 사운드트랙 앨범만 따로 듣는다면 상당히 인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음악들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한마디로 들어가 있어야만 하는 ‘바로 그 자리’에 그 음악들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도 그렇고 테마도, 내용도 모두 음악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영화인데도 음악들이 들어갈 ‘바로 그 자리’가 잘 보이지 않는 영화라니, 참 아이로니컬하기까지 하다. 영화음악이 영화 속에서 제대로 기능하게 만드는 건 영화음악가의 역량이기도 하지만 감독의 역량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별로 잘 짜이지 않았다. 제목인 <캐논 인버스>(서로 역행하면서 테마를 변주하는 전통적인 2중주곡)가 암시하듯, 바이올린에 얽힌 여러 운명들을 시간을 역행하며 섭렵하는 건 그렇다치고 그것들이 2차대전, 그리고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사건들과 얽히도록 만드는 건 어설펐다. 거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별로다. 특히 여배우의 연기는 너무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에서, 피아니스트로 분장한 이 백치미의 여배우는 전혀 피아니스트스럽지 않게 연기한다. 극단적으로 혹평을 하자면, 그냥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바보처럼 보인다. 사실상 어떤 영화에는 ‘바로 그 자리’가 없을 수조차 있다. 음악을 넣기 가장 힘든 영화가 그런 영화이다. 어딘가에 좀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그 자리가 아닌 거 같고, 그렇게 되면 여기저기 음악을 처발라서 결국은 음악도 망치고 영화도 망치기 십상이다. <캐논 인버스>가 약간은 그런 식이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감상적인 멜로디는 여기, 저기서, 나와줘야 할 것 같은 대목에서는 흐르고 또 흐른다. 끝으로 가면 갈수록, 그 멜로디들이 약간은 지겨워진다. 무절제하게 여기 저기서 등장하여 관객의 심리 상태를 어지럽힌다. 절제하여 딱 나올 대목에서만 나와주는 것과는 정반대. 그래서 극단적으로는, ‘침묵’이 가장 좋은 음악일 경우가 생긴다. 음악이 아무리 좋아봐야 헛것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트리오 1번이 그렇게 아름답고 좋지만 그게 영화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일단 그 아름다움은 괄호칠 수밖에 없다. 그 음악이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버려야 한다. 영화음악에는 ‘바로 그 자리’가 있는 것이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