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선로에 취객이 떨어졌다. 기차는 달려올 것이고, 그는 죽을 것이다. 누가 그를 구해줄 것인가 많은 생각이 오갈 것이다. 먼저 자신에겐 아무 피해가 없을 것인가를, 나말고 그를 구해낼 사람은 없는가를, 저 사람은 과연 구해낼 가치가 있는가를…. 그러나 그런 판단 이전에 그에게 내달리는 사람이 가끔 있다.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가 그랬고, 그는 죽었다. 그에게 다시 물어볼 수 있을까 당신이 똑같은 경우에 다시 처하게 된다면, 그를 살리기 위해 달려들 것인가 그런 낯 모르고 가치도 알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질 필요가 있을까 오쿠 히로야의 <간츠>(시공사 펴냄)는 바로 그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현실보다 훨씬 치사하고, 잔인하고, 끈질기게 묻는다.
용감한 카토와 어정쩡한 쿠로노가 그 시험장에 들어간 고등학생들이다. 그들은 지하철 선로에 엎어져 있던 노숙자를 구해내려다 열차에 치어 죽는다. 그러나 죽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정체불명의 방에서 온전한 몸으로 깨어난다. 그리고 그들과 비슷하게 생사의 중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만나 기묘한 시험에 뛰어들게 된다. 그들은 방 가운데 놓인 거대한 구체 ‘간츠’에게서 옷과 총을 받고, ‘파 성인(星人)’을 죽이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왜 죽여야 하는지, 죽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는 모른다. 사실 이 게임이 실재인지조차 알 수 없다. 누군가는 꿈이라 생각하고, 누군가는 방송사의 몰래카메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체를 묻기도 전에 징글징글한 파 성인 소년을 만나게 되고, 무기력한 그를 죽이는 통렬한 쾌감을 맛보고, 소년의 거대한 아버지에게 쫓기게 된다.
갈등의 순간, 당신의 선택은
1라운드가 끝난 뒤에 살아남은 세 소년은 이 게임, 혹은 인생의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갈등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세 가지 태도를 보여준다. 이미 이 게임의 선배인 중학생 니시는 철저한 계산성과 합리적 이기성의 대표자다. 목표한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위험 정도는 쉽게 눈감아버린다. 그 정반대편에 있는 카토는 인간애와 이타성을 대표한다. 지하철의 노숙자를 구하거나 강간 위기에 놓인 소녀를 구할 때에도 확실히 나서며,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하더라도 상대에게 쉽게 총을 쏠 수 없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우리 독자들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갈등의 소년 쿠로노가 있다. 약간의 의리는 있지만 자기 자신을 버릴 정도로 용감하진 않고, 왕가슴 소녀를 보고 계속 흥분해 있는 등 극히 자연스러운 태도의 인간이다.
결국 쿠로노가 다른 둘의 견제를 받으며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갈 것이며, 그 과정에 어떻게 자신을 바꾸어갈 것인가 하는 테마를 중심으로 만화는 흘러갈 것이다. 니시는 “시체사진 같은 걸 보는 게 즐겁지…. 나와 동류다. 너도 사실은 보고 싶은 거야. 이 녀석의 죽은 모습을”이라며 인간의 이기적 기계적 속성을 부추긴다. 쿠로노가 감각적으로 선택한 보디 슈트는 그러한 힘의 상징이다. 반면 카토는 용감했던 쿠로노가 초등학생 시절 자신의 우상이었음을 말하며, 그의 이타성과 영웅 심리를 부추긴다.
매우 색다르며 정교한 게임의 구조를 갖춘 <간츠>지만, 사실상 이 작품의 매력을 부추기는 것은 그 게임의 불성실함이다. 평범한 실내장식의 방에 있는 구체 ‘간츠’가 이 게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데, 그는 항상 적당히 일을 처리하며 실수도 자주 저지르곤 한다. 게이머들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도 오자투성이고, 게임이 끝난 뒤의 채점도 자기 내키는 대로, 마치 네트워크 공간의 채팅처럼 썰렁한 농담으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실수들로 파생되는 변수들이 다시 게임을 복잡하게 만들고, 결국 간츠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문제들을 게이머들이 해결해나가야 한다.
소년들을 문제에 처하게 하는 존재들은 그 도덕적 혹은 감정적 모호함으로 더욱 색다른 갈등과 고민의 요소를 만들어낸다. 두 소년이 목숨을 던지며 살려냈지만 그 고마움도 모른 채 또다시 쓰레기 인생으로 돌아가는 노숙자, 끝없이 성욕과 보호본능을 자아내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거치적거리는 짐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소녀, 나약하고 힘이 없지만 끝없이 불쾌감을 자아내는 파 성인 소년…. 그들은 우리 인생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들이다.
소년만화 마니아적 키워드의 복합체
기묘한 상상의 폐쇄 게임 <간츠>는 소년만화의 다소 마니아적인 키워드를 적절히 뒤섞어놓은 작품이다. ‘간츠의 방’에 이동할 때마다 사람들의 몸이 해부 슬라이스처럼 떠오르는 신체 절단과 가혹한 폭력(‘인체의 신비’전을 본 사람들은 이해가 될 것이다), 알몸 상태로 자살한 왕가슴 소녀의 부적절한 등장, 막강한 힘을 부여하는 기갑 보디 슈트 등은 소년들의 시선을 끄는 명료한 유행어들이다. 러프 스케치 이후 3D 작업으로 만들어진 인물과 배경을 다시 펜으로 그리는 선명한 영화적 입체감이 이 모든 것에 훌륭한 실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자면 이러한 닫힌 장르의 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은 충분히 즐길 수 없는 만화이기도 하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