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랐다.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5년 처음 이희재 선생을 만나 인터뷰할 때, 선생의 큰딸이 이모의 늦둥이 딸과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달 뒤 두 녀석을 어디에선가 본 기억이 났다. 그때 두 녀석들은 모두 초등학생이었다. 그런데 이 만화를 보니 고등학생이란다. 그렇구나. 지나가는 세월과 커나가는 아이들은 잡을 수가 없는 것이구나.
딸과 아빠가 함께 크는 만화
<해님이네 집>은 작가 이희재의 딸인 해님이(이유선)를 주인공으로 한 가족만화이자 성장만화다. 작가가 딸의 일기를 보고 아이들의 경험과 일상을 빌려 만화로 옮긴 작품으로 작가의 표현대로 반절은 아이들이 그린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맞닥뜨린 현실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스스로 깨달아버리는 남녀의 이치, 처음으로 브래지어를 하던 날, 중학교에 가기 위해 긴 머리를 자른 날 등 성장의 통과의례들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딸을 키우는 아버지라면 누구나 공감할 변화들, 귀엽고 철없는 꼬마가 서서히 여성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만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이들의 일상은 ‘성장’과 함께하는 ‘공부’에 대한 괴로움이다.
그림일기를 쓰지 못하게 해 상처받은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보고 상처받은 아빠, 영어공부 스트레스, 학교와 학원으로 이어지는 뺑뺑이 삶, ‘국산사자’라는 괴물들에게 물어뜯긴 아이, 한자경시대회에다가 산수경시대회에 기말고사 대비 총정리 문제집, 마지막으로 엄마의 잔소리까지. 해님이 일상의 대부분은 공부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고, 해님이의 괴로움 역시 공부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가만 보니 공부란 것이 온통 ‘국(어) 산(수) 사(회) 자(연)’이다. ‘음(악) 미(술) 실(과)’는 공부축에도 못 낀다. 해님이의 스트레스도 온전히 ‘국산사자’에서 나온다.
딸의 모습을 지켜보고, 딸의 그림일기를 훔쳐보고 그린 만화라서 그런지 <해님이네 집>은 온화하다. 객관적으로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면 아이들이 현실과 마주하는 고통에 주력했을 터인데, 이 책에서는 작가의 눈보다 아버지의 눈을 먼저 느끼게 된다. 해님이가 머리를 자르고 온 날, 자른 머리를 꼭 챙겨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해님이 엄마는 그냥 나와버린다. 해님이 아빠는 곧장 미장원으로 가 쓰레기통을 뒤져 아이의 머리를 찾아낸다. 그리고 혼자 남은 작업실에서 그 머리를 곱게 빗어 한지에 포장한다. 그 다음 페이지, 목도리를 함께 두른 아빠와 딸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한다. 아빠가 왜 그림일기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아빠와 중학생이 되는 딸, 이야기가 시작되자 주변의 배경이 사라지고 아빠의 말만 말풍선에 가득하다.이 만화는 초등학생 주인공 해님이에 대한 만화이지만 실상은 초등학생 주인공 해님이를 키우고 있는 (바라보고 있는) 아빠에 대한 이야기다. 엄마처럼 가까운 곳에서 싸우고 화해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슬퍼하는 아빠의 모습이 만화에 있다. <해님이의 집>의 아빠는 아이들에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화 창작 삼매경에 빠진 해님이를 지켜보고 빙긋이 웃음짓고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거지”라고 뿌듯해한다. 아이들은 나이를 먹고 커나간다. 아이들이 커나가는 것과 함께 부모도 성장한다. 아이들의 육체가 자라고 정신이 자라면, 부모도 함께 어른이 된다.
아쉬움을 달래준, 따뜻한 성장만화
우리는 <해님이네 집>으로 아름다운 성장만화를 한편 갖게 되었다. 한권으로 끝나 아쉽고 여러 매체에 연재된 원고가 하나로 모여 있지만, 만화를 그린 순간 작가가 아닌 아빠의 마음이 담겨 있어 더욱 반갑다. 게다가 그것이 다른 작가가 아닌 이희재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점이 흐뭇하다.이희재는 <간판스타>를 통해 한국 리얼리즘만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다. 2001년 6월 세 번째 판본으로 재출간된 <간판스타>는 1년이 넘은 지금도 판매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시간적으로 80년대 후반에 창작된 이 만화들이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이희재 만화가 주는 진정성의 무게를 이야기한다. 이희재와 오세영은 한국만화가 지탱해야 하는 리얼리즘의 무게를 떠받들고 있는 한국만화의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에 완성된 단편을 뛰어넘는 성과가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 크나큰 아쉬움이었다. 그래서인지 지난 5월에 10권으로 완간된 <삼국지>에 대한 평가가 상반된다. 혹평을 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한국만화가 출판시장에서 정당하게 평가받고 좋은 흥행성적을 올렸다는 점에서 왜 ‘이문열’인가에 대한 질문과 단편과 달리 긴장도가 떨어지는 흠은 덮어줄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 아쉬운 마음은 여전했는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구입하게 된 <해님이네 집>은 그 아쉬움을 달래주는 따뜻함이 넘치는 작품이었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
그림설명
딸 해님이의 엉뚱한 그림일기와 만화가인 아빠의 관찰기가 교차하는 <해님이네 집>. 딸이 성장하면서 겪는 통과의례를 바라보며 기뻐하고 슬퍼하는 부모도 함께 어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