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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밤은 부드러워, 마셔>
진영인 2023-12-19
한은형 지음 / 을유문화사 펴냄

인디안 페일 에일이 ‘창백한’(pale)이란 뜻인 줄 알고 색이 옅으면 도수가 낮을까 싶어 주문했더니, 뜻밖에도 독하고 써서 놀란 적 있는지. 인도로 간 영국인들이 고국의 맥주를 그리워해, 기나긴 항해를 버티라고 높은 알코올 도수로 제조하여 인도로 수출한 술이란다. 술을 사랑하는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잊지 못할 묘한 단편 <레더호젠>과 관련된 일화도 소개한다. 이 단편은 남편의 부탁을 받은 아내가 멜빵 달린 반바지 레더호젠을 사면서 저도 몰랐던 미움이 솟구친다는 내용이다. 옥토버 페스트용 의상인 가죽 레더호젠으로 꽉꽉 들어찬 베를린의 백화점 풍경을 실제로 본 저자는, 아내가 왜 화를 냈는지 바로 이해가 갔단다. 이처럼 술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쉽게 찾는 음료이기도 하지만, 어원과 문화적 맥락을 따지고 들어가면 세계를 한층 넓혀주는 취향이 된다.

<밤은 부드러워, 마셔>는 술과 그 술에 어울리는 음식, 술이 탄생한 역사 등을 계절에 따라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설탕을 빼서 시고 독한 헤밍웨이 다이키리를 마시며, 가혹하고 쓴 바다의 풍경을 즐긴 헤밍웨이를 생각한다. 기네스는 맥주가 아니라 아일랜드의 와인이라던 조이스의 말을 떠올리며, 기네스와 와인을 섞어 마셔보기도 한다. 이자크 디네센의 소설 <바베트의 만찬>에 나오는 식전주 아몬티야도는,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아몬티야도의 술통>에도 등장한다. “알면 알수록 먹고 싶어지고 알면 알수록 마시고 싶어진다.” 연꽃으로 만든 술 연엽주는 석쇠에 구운 송이버섯과 먹으면 어울린다. 오래 숙성할수록 맛이 부드럽고 깊어진다는 아와모리주는 올해의 야구 우승팀이 29년 만에 드디어 축하주로 마셨을 것이다. 이렇게 술이 취향인 세계가 넓어지면, 지금 딱 어떤 술이 필요한지 바로 알게 된다. 이를테면 커피 맥주는 진하고 육중한 맛이 나는 맥주에 에스프레소를 섞은 음료로, 커피로 정신을 깨우면서 알코올로 긴장을 풀어줄 수 있단다. 어떤 술이든, 한잔 따라놓고 한장씩 넘겨 읽으면 술과 딱 어울리는 안주처럼 술과 함께 부드럽게 스며들 그런 책이다.

285쪽

“술맛도 술맛이지만 내가 술의 맛을 둘러싼 세계의 내러티브에 열중하는 사람이라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