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엔딩이 언급돼 있습니다.
(노르웨이에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사랑하는 아내의 바람대로 (콜롬비아에서) 아이를 입양한다. 하지만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조차 되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아이의 카시트를 사러 가던 아내가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텅 빈 집에 (아직)아버지가 되지 못한/않은 남자와 (양)엄마를 잊지 못하는 아이가 남았다.
설정은 깎은 듯 정확하다. 그리고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간다. ‘아버지’ 역할에 서툰 남자 키에틸(크리스토퍼 요너)은 엄마를 잃고 상처받은 소년 다니엘(크리스토페르 베치)을 도닥여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한편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하기에 6살 다니엘은 너무 어리다. 다니엘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키에틸은 다니엘의 생모를 찾아 아이의 고향 콜롬비아로 향한다. 낯설지만 동시에 낯설 수 없는 콜롬비아에서 다니엘과 키에틸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으며 새로운 부자 관계를 맺은 다음 노르웨이로 돌아온다. 완벽하게 짜인 이 여정에 대해 누군가는 ‘부성애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지적했는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어쩐지 마음 한편이 불편해졌다. 이 글은 불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는 노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장면에서 시작해보자. 다니엘의 생모를 찾기 위해 키에틸은 아이가 살았던 콜롬비아의 고아원을 찾는다. 키에틸이 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다니엘을 알아본 소녀 두명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함께 놀자고 제안한다. 그네를 태워주며 재미있게 놀던 소녀들은 다니엘의 목에 걸린 가방을 발견하고 무엇이 들어 있냐고 물으며 열어본다. 장면이 바뀌고 원장과의 면담을 끝낸 키에틸이 다니엘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참을 찾은 끝에 기숙사 침대 뒤에 숨어 있던 다니엘을 발견한다. 하지만 영화는 다니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채 계속 진행된다. 며칠 후, 거리에서 야바위꾼을 구경하다가 키에틸이 건넨 말에 상처를 받은 다니엘이 갑자기 사라진다. 한참 뒤 다니엘은 경찰에게 발견되고 생김새가 다른 키에틸이 경찰에게 자신이 아빠라는 사실을 제대로 증명할 수 없게 되자 다니엘의 가방 속 여권을 확인해보라 하지만 여권은 사라지고 지갑은 텅 비어 있다.
여권의 상징
영화는 다니엘의 여권에 관심이 많다. 여권용 사진을 찍고, 인화되고, 여권이 완성돼 콜롬비아로 향하는 다니엘의 손에 도착할 때까지 영화는 그 과정을 꼼꼼하게 담는다. 비행기 안에서 다니엘은 자신의 여권을 (혹은 자신의 사진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콜롬비아 입국 심사대에서 여권을 내미는 다니엘을 한참 바라보던 직원은 엄마가 콜롬비아인이냐고 묻는다. 발화되지 않은 부분까지 다시 쓴다면 “콜롬비아인이 분명한 아이가, 왜 노르웨이인 아버지와 함께, 노르웨이 여권을 들고 있나요?”일 것이다. 키에틸을 돕던 택시운전사 타보의 어린 조카는 다니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리랑 똑같이 생겼는데 노르웨이인이야?”라고 의아해한다. 콜롬비아에 도착해 여행을 다니는 순간순간마다 다니엘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거리의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이제 여권을 잃어버리고 침대 뒤에 숨어버린 다니엘의 불안은 조금 더 분명해 보인다.
다시 입국심사 장면을 언급해야겠다. 엄마가 콜롬비아인이냐는 질문에 키에틸은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생모를 찾아 다니엘을 ‘돌려’주려는 키에틸에게 이 거짓말은 한편으로 은밀히 실현되길 바라는 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조금 복잡해지는 것은 다니엘의 양엄마 (노르웨이 국적자) 카밀라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친엄마) 콜롬비아 국적자(줄리 개리도)라는 사실이다. 키에틸은 콜롬비아 도착과 동시에 다니엘의 생모 줄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지만, 결과적으로 다니엘이 만나게 되는 것은 줄리가 아니라 ‘콜롬비아’이다. 2년 동안 지냈던 노르웨이와는 너무도 다른 자신의 ‘모국’(母國)에서 다니엘은 비어 있는 (친)엄마(母) 대신 자신의 출생지(國)만을 만난다.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이 콜롬비아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고아원 소녀들에게 여권을 빼앗기는 장면은 하나의 상징적 사건처럼 보인다. 이제 남은 건 다니엘의 선택뿐이다. 잃어버린 여권을 찾을 것인가(그래서 키에틸을 따라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엄마의 나라’ 콜롬비아에 남을 것인가.
한밤중의 신호
영화는 마치 다니엘의 운명을 키에틸이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놓았지만, 실제로 키에틸을 따라 노르웨이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건 키에틸이 아니라 다니엘이라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키에틸의 여정이 온전히 ‘부성애 발견’의 과정이 될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아이가 가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라며 택시운전사 타보는 자신의 여동생 빅토리아에게 다니엘을 맡긴다. 비슷한 또래의 딸을 키우는 빅토리아는 다니엘을 자신의 아이처럼 돌봐주고, 다니엘 역시 전에 없는 밝은 모습으로 스스럼없이 빅토리아를 대한다. 아내를 잃은 분노를 다니엘에게 터뜨리는 키에틸의 행동을 목격한 후 다니엘을 감싸주던 타보는 급기야 키에틸에게 다니엘을 빅토리아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이때 타보와 빅토리아의 제안이 다니엘 때문인지 아니면 다니엘을 맡는 대신 키에틸에게 받을 돈을 염두에 둔 욕심 때문인지 영화는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그러니 관객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그러나 이 제안을 망설임 없이 거절한 키에틸의 선택에 대해서는 조금 세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거리에서 문득 친엄마가 자신을 왜 버렸냐고 묻는 다니엘에게 키에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외려 노르웨이보다 ‘엄마의 나라’ , 고향에 오니까 좋지 않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이 질문에 답하는 대신 다니엘은 “이제 내가 싫어?”라고 다시 물어본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키에틸은 당황하며 우물쭈물 망설인다. 키에틸의 속마음을 알아버린 다니엘은 키에틸의 품에서 도망쳐 타보의 집에서 며칠을 머물고 둘은 서로 이야기도 거의 나누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사이 키에틸은 고아원 원장을 다시 만나러 간다. 상태가 좋지 않은 다니엘에게 아빠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충고하는 원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그는 생모 소식을 전해듣자 놀라며 대뜸 어디에 사냐고 묻는다. 키에틸이 생모를 찾아갔다는 사실은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알게 되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는 키에틸을 움직인 건 한밤중에 걸려온 다니엘의 전화다. 용건 없이 그저 잘 자라는 말뿐인 다니엘의 전화가 아빠를 향한 그리움 때문인지는 (관객의 바람과는 다르게)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단 한번도 자신을 따뜻하게 대한 적 없던 키에틸을 다니엘이 갑자기 그리워하게 될 만한 계기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던 6살 소년이 짧은 여정 끝에 아빠를 이해하게 됐다는 것도 무리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이 전화가 자신을 다시 노르웨이로 데리고 가달라는 다니엘의 신호라는 사실이다.
노르웨이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니엘이 원숭이 인형을 보며 “우리랑 살기 싫으면 어떡하냐”라고 묻자 키에틸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잘 보살펴주라고 말한다. 이 문답이 ‘나와 (또다시) 살기 싫어할까봐 두렵다’는 다니엘의 여전한 불안과 ‘그렇지 않게 내가 잘 보살피겠다’는 키에틸의 새로운 자기 다짐의 다른 말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자기 다짐 끝에 키에틸이 침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며 미련처럼 다니엘의 생모를 떠올리는 건 어딘가 석연치 않아 보인다. 아마도 여정 중에 만난 우울한 콜롬비아의 현실이 다니엘의 절박한 (구조) 신호에, 그리고 키에틸의 의무감 섞인 자기 다짐에 짙게 드리운 탓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