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봉준호에게 디테일이란 카메라의 객관성을 증언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봉준호가 인물들을 자세히 관찰할수록 관객은 인물과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봉준호의 카메라는 인물들의 낯설고 이상한 모습까지도 그대로 포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괴물>(2006)에서 강두(송강호)가 손님이 시킨 오징어 다리를 떼먹는 신은 강두가 한치 앞도 못 보는 캐릭터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강두는 보지 못한다. 관객은 본질적으로 보는 자이기에 보지 못하는 자는 관객에게 타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관객은 보지 못하는 자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외부에서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보게 된다.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여주는 것은 봉준호뿐만이 아니다. 만국노동자들의 에스페란토를 만들고 싶어 했던 채플린의 영화 속 ‘떠돌이’들은 모두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물정에 밝지 못한 ‘떠돌이’들은 자신의 불행을 야기하는 사회적 모순을 보지 못한다. 관객은 이들을 멀리서 보게 되고, 그래서 관객은 이들의 삶을 코미디로서 향유하는 한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뚜렷이 보게 된다. 장이머우의 <인생>(1994)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부귀(갈우)가 딸의 죽음의 근본적 원인인 문화대혁명의 부조리는 말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어리석음만을 자책할 때 관객은 문화대혁명의 부조리를 선명하게 포착한다.
욕망의 타자화
<7호실>(2017)의 디테일도 봉준호의 그것처럼 영화의 객관성을 보증해준다. 예컨대 두식(신하균)이 라면을 먹고 대충 뒤처리하는 모습을 디테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가 게으르고 근시안적인 인물임을 보여준다. 두식은 개수대에 물은 조금 부어놓지만 그릇을 설거지할 생각은 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해결하는 시늉만 한다. 두식이 DVD방을 인수한 것도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혼이라는 상실을 겪고 있고, 그 상실을 일확천금으로 보상받고자 한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타자들의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자기 내면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이다. 영화는 미신을 통해 일확천금을 이루고자 하는 두식의 어리석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욕망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관객은 두식이 보지 못하는 두식의 내면을 본다. 즉, 관객은 그의 소시민적 욕망이 주조된 욕망이며, 그가 이 욕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굳게 믿음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두식은 욕망을 이용하고 있다. 이 점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와도 상통한다. 이 영화에서 모든 사건은 수남(이정현)이 불행을 해결할 수단으로 집을 사면서 시작되는데, 수남이 원했던 것은 집이 아니라 광고 속 행복한 가정의 이미지(시뮬라크르)였다. 수남은 현실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보다 그녀에게는 쉬운 다른 방법, 즉 성실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수남은 너무 성실하고 가련하기까지 해 관객은 수남과 비판의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관객은 수남을 안타까워할 뿐 소시민적 욕망의 비판적 성찰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관객이 인물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 인물은 (어딘가 낯설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타자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편 두식이 은폐하려는 문제들은 무언가 새어나옴으로써 드러난다. 두식은 DVD방에 물이 새자 한욱(김동영)에게 항상 그래왔듯이 대충 닦으라고 지시하고, 이것으로 모든 사건이 시작된다. 그리고 한욱의 시체가 담긴 캐리어를 보관한 창고에 물이 샘으로써 두식에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여기서 ‘샌다’는 것은 비유로 볼 수 있다. 즉, 두식과 두식의 공간은 문제들을 완전히 봉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굳건하지 못하기에 자꾸만 무언가가 새는 것이다. 냄새가 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두식은 방향제의 냄새로 살짝 덮음으로써, 즉 은폐함으로써 사건을 봉합하려 한다.
거리두기에서 발생하는 희망
구체적으로 이 ‘샌다’는 비유는 은유라기보다는 환유다. 환유는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비유인데, 그래서 환유는 비유인 동시에 실재다.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무거움도 실재이며 동시에 비유다. 무거움은 두식이 짊어져야 할 물리적인 무게인 동시에 죄의 무게이며 삶의 무게이기도 하다. 두식이 죽은 한욱을 혼자 짊어지는 데서 오는 물리적 무거움은 죽은 상권으로 인한 손해를 혼자 감수해야 하는 경제적, 심리적 무거움에서 기인했다. 무거움을 분담해야 할 건물주는 죽은 상권으로 인한 손해도, 건물의 관리 소홀로 인한 한욱의 죽음에도 책임지지 않는다. 건물주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다. 그는 약자들을 보지도 않고 무거운 짐을 떠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거운 짐을 누가 들 것인가에 관해 약자들끼리의 싸움이 시작된다. 약자들은 이미 각자의 무거움이 있기에 그들의 싸움은 필사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누구보다 무거움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연대의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연대가 어려운 이유는 단지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다. 각자도생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침투한 결과다. 사회의 헤게모니가 개인간의 관계로, 그리고 개인의 내면으로 스며들고, 또 그 개인들이 사회 전체를 이루는 프랙털 구조인 것이다. 즉, 부분인 동시에 전체다. 이러한 프랙털 구조의 전형은 봉준호의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 볼 수 있다. 윤주(이성재)가 반려견을 살해하고 추방하는 공간인 아파트는 원주민을 추방한 뒤 세운 건물이다. 전체의 폭력성이 개인에게 스며들고 폭력적인 개인들이 다시 사회 전체의 폭력성을 강화한다. 전체의 폭력성은 점점 더 작은 단위까지 파급되어 작은 프랙털들을 계속 생성한다.
<7호실>의 결말에서 두식은 교감 선생님의 얼굴을 본다. 두식이 처음 교감 선생님을 대할 때와는 다른 표정이다. 결말부의 두식은 상황에서 벗어난 관찰자의 지위에 가깝다. 이로써 시지각적 상황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두식은 교감 선생님의 얼굴에서 예전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용승은 전작 <10분>(2013)의 결말에서도 이처럼 시지각적 상황을 창출했다. 호찬(백종환)이 회사를 그만둘지 계속 다닐지를 결정하는 10분 동안 호찬은 외부자도 내부자도 아닌 지위에서 인물들을 관찰하는데 이때 호찬의 눈에 들어오는 인물들은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호찬의 시선을 따라서 관객도 관찰하고 사유하게 된다. 들뢰즈의 표현을 따르면 견자(見者)의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상의 전체성을 보기 위해서는 적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좋은 영화들은 대상을 이해하고 대상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는 적정한 거리를 찾기 위해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전체로서의 순간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영화는 전체로서의 순간, 즉 환유다. 영화는 어떤 인물의 삶의 일부를 보여줄 뿐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그 인물의 삶 전체를 본다. 또한 그 인물을 통해 우리의 삶을 조망한다. 영화는 언제나 현재라는 순간 속에 머무는 인간들에게 삶의 전체성을 보여준다. <7호실>도 삶의 환유적인 순간들을 포착해냄으로써 확장된 환유로서의 삶 전체를 보여준다. 영화는 조금은 멀리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두식을 통해 우리의 고통과 슬픔도 언젠가는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