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원 감독의 장편영화 <소통과 거짓말> <해피뻐스데이> 두편이 최근 개봉했지만 저예산 독립영화의 처지가 흔히 그렇듯 많은 관객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승원의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영화들은 상업영화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묘사들로 화면의 표면을 채워 반도덕의 도발 그 자체로 호소한다는 오해를 사기 쉬운 데다, 이런 유형의 충격적인 소재로 작품의 개성을 포장하려는 시도는 이미 국내에서도 여러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피상적인 정보만 갖고는 굳이 이승원의 영화에 접근할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 신청된 이승원의 두번째 장편영화 <해피뻐스데이>를 보고 나는 그의 영화가 섣부른 오해를 사기 쉬운 진정성의 폭탄이며 머지않아 주류 한국영화계에도 상당한 자극을 줄 잠재적 재능의 징표라고 봤다.
개봉 즈음에 다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나의 건방진 태도를 반성했다. <해피뻐스데이>와 이승원의 첫 장편 <소통과 거짓말>은 적은 제작비에 따른 낮은 기술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발광하는 아름다운 진실의 순간들로 뭉친 작품들이다. 유별나게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 인간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감독 이승원의 절실한 접근은 데뷔작 <소통과 거짓말>을 통해 (나는 몇해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영화를 이번에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이미 적절한 표현의 통로를 찾았다. <해피뻐스데이>는 이승원이 데뷔작에서 극한까지 밀어붙였던 불행한 인간들의 흉터투성이인 삶의 묘사를 이어가면서도 삶과 죽음, 상처와 재생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고유한 방식으로 접합한 것이 인상적이다.
서서히 드러나는 징후들
<해피뻐스데이>는 전신마비인 장남의 대소변을 번갈아 받아내야 하는 한 가족의 하루 일상을 시간 틀로 삼아 그 장남의 생일에 온 가족이 모여 어떤 음모에 의무적으로 가담해야 하는 내용을 담은 이야기다. 그 음모의 전개와 귀결에 서사적 긴장이 붙어야겠지만 그걸 방해하는 것은 가족 구성원 대다수의 정상성 규범에 벗어나는 말과 행동이다. 영화 초반에 소개되는 남매 상훈(박지홍)과 아현(김애진)은 방에서 함께 지내면서 하릴없이 뒹굴거리며 티격태격하는데 여장을 하고 여자가 되고 싶어 하며 어머니로부터 여자로 인정받은 상훈의 위치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남매가 아닌 자매다. 곧이어 집안 막내 승환(김성민)이 화면에 등장하는데 동네 깡패 형을 동경하는 그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대상을 정하지 않고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고 칼을 들고 설쳐댄다. 그다음에 집에 도착한 셋째아들 성일(이주원)은 그런 승환을 완력으로 제압하는데 틱장애가 있는 그가 겉보기에 우스꽝스럽게 말할 때마다 그가 데리고 온 약혼녀 정복(장선)은 상스럽게 낄낄댄다.
이 가족 구성원은 서로 뭘 하든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삶을 독립적으로 영위하며, 가족 누군가가 망가진 행동을 해도 또 다른 누군가는 그걸 재미있어 하는 상황들이 연이어 이어진다. 아버지가 없는 이 집안의 대장은 어머니인데 그가 겪은 불행은 가족들의 출생 계보를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누군가는 어머니가 동네 건달에게 성폭행당해 낳은 아들이고 누군가는 이 집안 아들이 성폭행한 탓에 데리고 들어와 키우는 딸이다. 이런 사연들은 영화가 진행된 지 한참 후에 차츰 밝혀진다. 감독 이승원은 등장인물들의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의 농도를 높여 반복적으로 제시한 다음에 우리가 그들의 사연을 궁금해하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의 그런 행동동기에 대한 단초를 희미하게 설명한다. 인물들의 행동을 심리적 외상에 따른 징후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걸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승원은 관객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이 겪는 물리적 징후의 결과들을 지켜보는 쪽으로 안내한다.
<해피뻐스데이>의 화면에 나타난 물리적 징표들은 블랙코미디의 톤으로 묘사하는 척 위장하지만 실제로는 관객에게 난처함을 안긴다. 앞서 거론한 초반 장면에서 귀가하자마자 칼을 휘두르며 발작적인 행동을 하는 승환을 처음에는 여장 차림의 상훈이 말리는데 그 두 사람이 엉켜 이리저리 구를 때마다 상훈의 치마 속 삼각팬티가 드러나며 표시되는 것은 불쑥 발기된 성기다. 상훈의 발기된 성기를 보고 우리가 킥킥대고 웃는다면, 그건 어울리지 않게 여장을 한 배 나오고 못생긴 인물의 복장도착을 변태라고 비웃는 냉소의 묘사 전략에 따른 반응인지, 아니면 불우하게도 미모를 타고나지 못했으나 여하튼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인물에 대한 자발적인 공감의 데이터를 쌓아가는 반응인지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숙고가 필요하다.
이런 식의 묘사는 이 영화에 수두룩한데 가장 논란의 여지가 되는 것은, 영화의 중심 플롯에서 잠시 벗어나 곁가지로 묘사되는, 막내 승환과 존경하는 동네 양아치(감독 이승원이 직접 연기한다)가 만나는 장면이다. 말끝마다 욕이 붙어 있는 이 인물은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며 승환 앞에서 허세를 떨다가 식당의 다른 손님들을 겁박한 후 밖으로 나와서는 근처를 지나가는 여학생을 한 건물 화장실에서 성폭행한다. 승환의 형 성일이 화장실로 찾아와 상황을 종결시키고 그 동네 양아치를 마구 때릴 때 뜻밖에도 그는 싱겁게 성일의 완력에 굴복하며 심지어 무릎을 꿇은 상태로 거듭 사과하면서 자기가 무릎이 좋지 않다고 징징댄다. 화장실에서 나온 성폭행 피해 여학생이 팬티를 끌어올리며 “이 새끼 죽여버리면 안 돼요?”라고 말할 때 이 장면은 끝나는데, 원래는 이승원이 연기하는 그 인물이 울면서 얘기하는 긴 장면이 있었으나 편집됐다고 한다. 이 장면은 단순히 받아들이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삽입된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관객의 불쾌를 일으키기 위한 불쾌한 장면은 관객의 도덕적, 심미적 기준을 혼란시킨다.
불구의 형상으로 제시된 초상
이승원 감독은 끈질기게 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도덕적 불구자로 그린다. 여기에는 상대적으로 도덕적 우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들이 없다. 영화 초·중반 큰아들을 찾아온 장애인 성도우미를 어머니가 맞이할 때 며느리 선영은 그를 벌레 대하듯 한다. 거듭 감사를 표하던 어머니도 그 여자에게 얼마나 병균이 많겠냐고 하는 며느리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금방 마음이 변한다. 도우미가 작업을 하러 큰아들이 있는 이층 방으로 올라갔을 때 짐승같은 큰아들의 괴성이 울려퍼지고 별일 아니라는 도우미의 말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를 비롯한 가족들은 난리를 치는데 이때 화면에 담기는 것은 반나체의 도우미다. 이 여자의 처지는 가족들에 의해 삽시간에 불쌍한 사람을 능멸한 가해자로 바뀐다. 그런가 하면 성일의 약혼녀 정복은 시도 때도 없이 음란한 말로 상대를 공격하며, 성일의 형이자 이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인 선영의 남편 기태는 상전 모시듯 그런 그를 공손하게 대하며 맞장구를 친다. 기태의 아내인 선영은 성일과 관계했었고 기태와 딱 한번 관계한 것 때문에 딸을 낳았으며 그 딸이 성일과 기태 중 누구의 유전자를 받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떠들썩한 소동극의 분위기 속에서 불구의 형상으로 제시된 가족의 초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상투적인 도덕관의 경계를 넘어서며 점차 그들과 나란히 수평적인 위치에서 그들의 삶을 긍정도 부정도 아닌 관점으로 보게 만든다.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가족을 힘겹게 꾸리고 버티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이 살아 있으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지독한 고통의 대가라는 걸 드러내지 않고 공유한다. 영화 중·후반, 채팅으로 누군가를 만나러 간 상훈은 아현이 휴대폰으로 상대방에게 사진을 전송하는 바람에 허탕을 치고 귀가하는데 슬퍼하는 상훈을 키득대며 놀리는 아현은 “넌 나하고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돼”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모두 공범으로 가담한 음모를 마무리하는 심야 술자리에서 함께 있는 다른 가족들에게 “너희들, 내 밑구녕으로 다 들어와. 다 죽어버려”라고 말한다. 이들은 영화에 나오는 또 다른 대사처럼 ‘죽어야 사는 것’이라는 역설을 각자 스스로 체화하고 있다. 죽음이 없다면 이 삶은 무한하고 무한한 삶은 고통이며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지 않았던 어머니 자궁 속의 시원으로 이들은 돌아가야 한다. 그때까지 이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그 상처를 통해 살아 있는 것을 감각하는 순환 고리에 갇혀 있다.
세속의 도덕으로 수식될 수 없는 삶의 진흙탕
놀랍게도 이 영화가 도달하는 것은 죽어야 사는 것이라는 역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승원 감독은 자기만의 거친 방식으로(스포일러라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어떤 등장인물이 또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현존 방식은 세속의 도덕으로 가닿을 수 없는 무한한 인간긍정의 도달점이다. 우리가 본받고 싶고 환상의 영역에서나마 감정이입하고 싶은 영웅 서사의 정반대편에서 이 영화는 이해할 수 없고 망가져 있으며 저 스스로 감출 수 없는 상처의 자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이는 인물들을 통해 그들에게 수직적 연민을 보낼 수 없어 당황하는 우리 자신을 느끼게 한다. 그들은 우리의 수직적 연민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들과 수평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위치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속의 도덕으로 옹호되거나 수식될 수 없는 삶의 진흙탕에서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공존하는데 그들이 필사적으로 사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방기한 삶을 통해 이미 죽음과 가깝게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 삶을 갈망한다.
이 역설을 표방하는 것은 며느리를 연기하는 김선영의 존재다. 영화의 말미에 가족들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큰아들의 방에 들어가 자기 삶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며느리의 말은 세속적 도덕의 경계를 놀라울 정도로 위반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느 누구의 것에 비해서 인간적이다. 이때까지 단독 화면을 거의 쓰지 않았던 감독 이승원은 이 장면에서 클로즈업을 구사하는데 이 예외성으로 드러나는 것은 며느리의 개별성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것까지 포괄하는 대표성이다. 이어지는 마지막 가족 소풍 장면에서 다시 한번 배치된 김선영의 클로즈업은 폐소공포증의 지옥도였던 영화의 공기를 휴식의 온기로 바꿔놓는다. <해피뻐스데이>는 낭비되고 있는 최근 한국 주류영화의 클로즈업 사용 문법의 결함을 재고하게 하는 반면교사이며 텔레비전 드라마의 호흡이 아니라 블록으로 짜인 화면의 긴장이 쌓일 때 단독 화면의 정서이입 효과가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를 웅변한다.
슬픔을 표현하는 것을 잃어버린 사람
이제 이승원의 데뷔작 <소통과 거짓말>을 짧게 말할 차례가 되었다. <소통과 거짓말>은 <해피뻐스데이>에 비해 훨씬 어둡다. 등장인물들이 겪고 있는 내면의 지옥을 따라가며 관객이 경험하는 것은 끊임없는 감정적 하강이다. 정사각형 사이즈로 찍힌 화면은 인물들에게 일체의 탈출구도, 약간의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인물들을 가두며 장선과 김권후가 연기하는 남녀 주인공은 각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채 자신의 신체가 파열되는 과정을, 또는 자신의 마음이 붕괴되는 과정을 또 다른 자아가 지켜보는 듯이 행동한다. 일차적으로 이 인물들의 자기파괴적인 일상들이 묘사되는 면면은 아프다. 우리는 마음이 아플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아프게 될 것 같은 착각을 이 영화를 보며 느낀다. 경이적인 것은 그 병든 인간의 슬픈 상황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살아내는 것처럼 해내는 배우들의 연기다.
<해피뻐스데이>에서 정복을 연기했던 장선은 특히, 어떤 연기론도 무색한 몰아의 경지를 화면에 구현한 것처럼 나는 느꼈다. 장선은 슬프다는 것을 슬프다고 표현하는 게 아니라 슬프다는 것을 슬프다고 표현하는 것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영화 속에 존재했다. 이것은 의지로 되는 것도, 이해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나는 추측한다.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 인물의 슬픔에 거의 완전히 동화될 수 있는 기운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슬픔과 불행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에는 예상하기 힘든 기운이 필요하다. 다르게 말해서 우리는 자신을 훼손하면서까지, 또는 훼손할 수 있는 용기와 기운을 갖춰야만 다른 사람의 슬픔의 깊이에 가깝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장선의 연기가 그 비슷한 경지의 훼손을 치르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성취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