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처음 악인의 이미지로 각인되는 순간은 진궁과의 일화에서다. 조조는 동탁 암살에 실패한 뒤 진궁과 함께 지인인 여백사의 집으로 도망치는데, 조조는 여백사의 가족들이 자신을 살해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들을 몰살한다. 조조는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닫지만, 그 후 집으로 돌아오는 여백사까지 살해한다. 진궁이 놀라며 불의를 꾸짖자 조조는 “내가 천하 사람들을 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버리게 하진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조가 목격자가 될 수 있는 여백사까지 모두 살해했다면, 이 일화를 진술할 수 있는 증인은 진궁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진궁은 죽을 때까지 조조와 대립하는 인물이기에, 진궁의 진술은 신빙성이 낮다. 독자들도 이 일화의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머릿속에 각인된 살인자의 이미지는 강력해서 그 후 조조의 행위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미지가 가진 기만적인 힘이다.
<남한산성>은 이런 이미지의 기만적인 힘을 최대한 자제하고, 중립적으로 사안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대립하는 두 인물,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가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 영화를 중립적이라 할 수 있는가? 중립을 표방하며 교묘한 방식으로 어떤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중립을 표방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정치적) 선언은 아닌가? 이 글은 위의 질문들에서 시작되었다.
신념은 동일선상에서 평가할 수 있는가
명길이 말한다. “만백성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상헌이 다시 응수한다. 두 사람의 이 논쟁 신에서 카메라는 명길을 45도 각도로 찍고, 그 뒤 90도 회전해서 바로 옆에 있는 상헌을 찍는데, 이로 인해 명길이 프레임의 오른쪽에서 말하고, 그 후 상헌이 프레임의 왼쪽에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울처럼 마주 선 두 사람의 대립을 보여주는 이 신은 영화 전체를 축약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상헌과 명길의 말의 전쟁, 신념의 충돌에 대한 것이다. 이 점에서 뚜렷한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이 영화의 촬영과 편집도 이해가 가능하다. 카메라는 영화의 계절적 배경이 되는 겨울처럼 차갑게 대상을 다루는데, 이것은 감정이입을 강요하기보다는 신념을 들여다보기를 요구하는 듯이 보인다. 또 다른 시퀀스에서 명길의 말에 상헌은 이렇게 응수한다. “명길이 말하는 삶은 곧 죽음이옵니다!” 이 역설은 상헌의 신념과 결기를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해준다.
그런데 상헌에게 ‘명길이 말하는 삶’, 즉 청과의 화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굴욕적인 삶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굴욕이란 말인가? 이것이 문제다. 우리는 무엇에 분노해야 하고, 무엇에 관용 또는 인내해야 하는가.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질문이다. 상헌에게 굴욕은 결국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랑캐’에게는 머리를 숙일 수 없어도 한족(漢族)에는 머리를 숙일 수 있다는 전제가 있다. ‘오랑캐’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 명에 대한 사대주의가 근저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상헌의 신념이 가진 역사적 뿌리를 드러내지도, 질문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상헌의 신념과 명길의 신념을 동일선상에 놓는데, 이것은 모든 신념은 동일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 선언과 맞닿있다.
물론 과거를 현대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평가하고자 함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허구의 영화, 지금 여기의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 즉 파롤로서의 <남한산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민중이라는 가면을 쓴 신화적 장치
<남한산성>의 민중, 군졸들은 대부분 이름을 가지지 못한, 무기력한 사람들의 무리로 구성되어 있다. 관객이 얼굴과 이름을 숙지한 인물이 군졸로 등장하는 전투 신은 날쇠(고수)가 등장하는 초반부의 전투 신뿐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군졸들의 죽음에도 관객은 스릴도, 군졸들의 불안과 공포도 느낄 수가 없다. 이들은 권력자들을 위한 전쟁에서 탈주할 희망도 품지 못하고 국가의 구원만을 기다린다. 말하자면 국가는 민중의 유일한 구원자다. 그리고 이들을 구원해줄 국가의 대리인으로 상헌이 등장한다.
상헌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민중과 소통하는 양반이다. 그리고 이름을 가진 허구의 민중, 날쇠와 나루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상헌을 부각하는 데에만 이용된다. 상헌은 날쇠의 말을 들어주고 국정에 반영해주는, 민중의 편에 선 인물이다. 민중의 편에 선 인물을 비난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날쇠는 상헌에게 첫 번째 방어막인 셈이다. 두 번째 방어막은 나루다. 나루는 상헌이 살해한 사공의 손녀로, 상헌이 보호하는 인물이다. 즉, 상헌은 민중의 보호자 지위에 있다. 또한 나루는 상헌이 자신의 죄책감을 계속 상기하는 윤리적인 인간임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처럼 허구의 민중은 상헌의 훌륭한 인품을 보여주는 데 이용된다. 이 영화의 기만이 여기에 있다. 영화는 초반부까지 말의 전쟁, 신념의 투쟁을 보여주며, 명길과 상헌의 주장 어느 쪽으로도 판단을 내리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중·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상헌을 (허구의) 민중의 보호자 지위에 올려놓는다. 상헌의 낡은 생각은 소녀 나루의 무구함으로 가려지고, 관객은 상헌에 대해 평가하기가 힘들어진다. 영화가 표방하는 중립성은 오히려 편향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이 점에 대해 롤랑 바르트는 엘리아 카잔의 <워터프론트>(1954)를 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테리(말론 브랜도)는 긍정적인 주인공이어서 그의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보내게 된다. 우리는 그를 비판하거나 그의 객관적인 어리석음을 알아차릴 수 없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역할로부터 거리두기라는 방법을 제시한 것은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의 위험에 대항해서이다.” 긍정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주인공의 말과 행위를 관객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위험성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인물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인물의 말과 행위에 대한 긍정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결국, 신념을 판단할 수 없다는 허무주의적 선언은 인품에 대한 평가로 귀착된다. 정치가 들어서야 할 자리에 정치를 삭제하고 원자화된 개인만을 남겨놓은 꼴이다. 물론, 상헌은 신념과 절개가 있는 인물이지만 이것이 그의 숭고함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신념이 인간을 숭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숭고한 신념이 인간을 숭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헌의 숭고함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념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의 정의가 ‘비정치화된 파롤’(롤랑 바르트)이라면, 이 영화는 그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 신화적 장치를 제거하고 남는 상헌의 충과 강직함이란 하나의 가치에 대한 맹목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말의 전쟁이 아니라 말의 잔치로 이것을 포장하고 있다. 포장을 걷어낸 이 영화의 메시지는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에 하나의 가치에 대한 향수가 필요한가? 영화가 끝난 뒤, 영화가 제기하지 않은 질문들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