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 다른 이름Elias Kazanjoglou; 엘리아스 카잔 조글루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09-09-07
- 사망2003-09-28
- 성별남
소개
대표작 <신사협정>,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워터프론트>, <에덴의 동쪽>, <초원의 빛>
영화는 연극의 ‘인접예술’로 출발했다. 아직 독자적인 내러티브나 영상표현법을 찾지 못한 초창기의 영화는 연극무대를 그대로 촬영해서 재연하는 ‘움직이는 그림’으로서 대중의 호기심을 얻었고, 그만큼 초기영화가 그 예술적 표현의 많은 부분을 연극에서 빚지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엘리아 카잔은 1909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터키 사람은 아니었고, 그의 양친은 나라를 옮겨다니며 사업을 하는 그리스 사람이었다. 카잔이 2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베를린으로 옮겼으나 부친의 사업이 여의치 않자 그의 아버지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먼저 미국으로 떠났고, 나중엔 가족까지 모두 불러들였다.
뉴욕에 정착한 카잔은 예일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한 뒤 대학의 추천을 받아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다. 차츰 능력을 인정받은 카잔은 조연출을 거쳐 마침내 무대 연기자로 데뷔한다. 한편 엘리아 카잔은 영화 만들기에도 관심을 보여 동료들과 함께 몇편의 실험성 강한 전위적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연출자로 승진한 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모두가 나의 아들들> 같은 무대극을 연출한다. 꾸준히 단편영화와 연극을 오가면서 활동을 하던 엘리아 카잔에게 첫 장편영화의 연출기회가 온 것은 1945년에 만든 <브루클린에서 자라는 나무 A Tree Grows in Brooklyn>였다. 이후 1950년대까지 데릴 자눅이 사장으로 있던 20세기폭스사는 그가 주옥 같은 할리우드 명작을 만드는 터전이 되었다.
이후 작품들은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늘 사회적인 이슈들에 관심을 두었다. <부머랭 boo-merang>(1947)과 <거리의 혼란 Panic in the Streets>(1950)은 깔끔한 범죄드라마로서 오해와 저항, 이해의 부족을 무릅쓰고 개인과 대중을 위해 일하는 정부관리들의 용기있는 행위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다작의 해 1947년에 그가 내놓은 세번째 작품 <신사협정 Gentleman’s Agreement>으로 완성도 면에서 높은 평가를 얻고 그해 아카데미에서 작품, 감독, 여우주연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둔다. <신사협정>은 일관되게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카잔의 ‘냉정한 리얼리즘’이 반유대주의를 소재로 하여 최초로 꽃피운 작품이다. 1949년 만든 <핑키 Pinky> 역시 인종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후 카잔은 무대 시절 연출했던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1951)를 연출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말론 브랜도라는 신인 연기자를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으나 비비안 리의 연기는 기대에 못 미쳤으며, 연극무대를 지극히 양식적으로 영화로 옮겼다는 평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 1952년 카잔은 미국의 마녀사냥, 매카시 선풍이 불어닥치고 있는 가운데, 의회 반민주활동위원회에 소환되어 자신이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공산당원이었음을 고백하고 자신이 알고 있었던 당원들의 이름을 댔다. 일종의 변절을 한 셈인 그는 자신의 공산주의 경력이 과오였음을 인정하고 공산주의와 공산주의들을 색출하는 데 협력할 것을 촉구하는 글을 <뉴욕타임스>에 실었다. 이때부터 카잔의 영화 경력에서 자신의 정치적 태도의 변화를 공개적으로 정당화하는 미묘한 변화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해 52년에 만든 <혁명아 자바타 Viva Zapata!>는 사바타의 일대기를 통해, 독재 정권과 같은 전체주의적 방법에 의해서는 결코 혁명이 달성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또한 <팽팽한 줄에 매달린 사나이 Man on a Tightrope>(1953) 역시 냉전기간에 소련에서 탈출하는 체코의 서커스단을 묘사한 반공영화였다.
이러한 점은 그의 가장 뛰어난 영화 <워터프론트 On the Waterfront>(1954)에 이르러서도 미묘하게 반영된다. 이 영화는 부두 노동자와 자본 계급간의 대립을 빌려 정부에 대한 범죄 행위를 제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말론 브랜도가 부두 노동조합의 깡패집단을 정부에 고발한 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난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외칠 때 자신도 동일하게 뜨거운 느낌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워터프론트>는 강렬하지만 자연스러운 연기방법과 네오리얼리즘적인 연출이 결합된 것이기도 했다(예를 들어 그는 부두 노동자들이 나오는 신에서 실제 부두 노동자들을 썼다). 이 한 작품으로 그는 정치적으로 다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고,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6개의 오스카상을 거머쥐었다.
연극에서 시작한 그의 경력은 배우들을 다루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와 리 스트라스버그는 1947년 이제는 고전적인 연기방법의 하나인 메소드 연기법의 효시가 되는 연기학교 ‘액터즈 스튜디오’의 문을 연다. 이후 1950년대 카잔의 영화들은 액터즈 스튜디오의 제자들과 함께 한 것이었다. 말론 브랜도를 위시하여 제임스 딘(<에덴의 동쪽> 1955), 캐롤 베이커(<베이비 돌> 1956), 앤디 그리피스(<군중속의 얼굴> 1957), 내털리 우드와 워런 비티(<초원의 빛> 1961) 등은 그의 지휘 아래 21개의 오스카 후보와 9개의 오스카 주연배우상을 따내는 성과를 올렸다.
1955년 카잔은 존 스타인벡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카인과 아벨을 모티브로 한 영화 <에덴의 동쪽>으로 당시 젊은이들의 좌절과 절망을 생생한 터치로 그려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가족간의 굴레와 애증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고, 이러한 그들의 처지는 당시 사회상인 전시상황과 맞물리면서 더욱 그 주제와 감동이 증폭되었다. 이러한 일그러진 청춘군상과 가족간의 갈등은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lass>(1961)에서도 유사하게 동어반복되는 것이었다. 이후 대중적 인기 속에 존재하는 엄청난 정치적 힘을 알아차리게 되는 라디오 텔레비전 진행자의 이야기 <군중속의 얼굴 A Face in the Crowd>(1957)과 테네시 계곡의 댐 공사를 사이에 두고 정부와 개인의 갈등을 그리는 <야성의 강 Wild River>을 끝으로 그의 사회 영화들은 막을 내린다. 1960년대 이후 그는 자신의 주특기인 연극의 영화화나 사회적인 이슈들보다는 좀더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프로젝트들을 진행시킨다. 자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민사를 영화화한 작품 <아메리카, 아메리카 America America>(1963), 역시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한 <열망 Arrangement>(1969)와 고국에서 찍은 16mm영화인 <방문자 The Visitors>(1972) 등은 흥행이나 비평 측면에서 완전히 실패를 면치 못하는 부진의 연속이었다. 무대와 영화연출을 오가며 계속 작업을 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그는 1976년 <마지막 거물 The Last Tycoon>을 끝으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엘리아 카잔이 세운 메소드 연기법의 전통과 사회파로서의 그의 생생한 활약은 할리우드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2차대전 직후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할리우드에 들어와 미국영화의 특질을 가장 잘 표현해내면서 화면 속의 삶을 바로 극장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네오리얼리즘적인 기법으로 변모하는 할리우드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자서전 <인생 A Life>이 1988년 출판되었으며, 그의 아들 니콜라스 카잔은 <행운의 반전 Reversal of Fortune>을 쓴 각본가이며 1994년 아버지 뒤를 이어 <드림 러버 Dream Lover>로 감독 데뷔했다. <b>[씨네21 영화감독사전]</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