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 무려 4편의 스티븐 킹 원작 소설이 미국에서 영상화됐다. 6월에 방영한 드라마 <더 미스트>를 시작으로, 8월에는 영화 <다크타워: 희망의 탑>이 개봉했고 또 다른 드라마 <미스터 메르세데스> 역시 비슷한 시기에 방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 <그것>의 개봉 소식이 들려왔다. 원작에 대한 팬덤이 강한 데다, 이미 두 차례나 영상화된 작품이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러 선입견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나는, 원작자가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의 이번 작품에 만족감을 표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영화를 접했다. 스티븐 킹이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 각색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그 작품을 싫어한 나머지 심지어 동명의 TV시리즈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아니, 어쩌면 잭 니콜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배트맨>(1989)에서 보여주었던 미친 광대의 이미지가 ‘그것’의 외양과 겹쳐졌다. 여하튼 그 과정에 스티븐 킹과 큐브릭의 모티브 찾기 방식, 혹은 알레고리의 도식화 방식에 대한 여러 가지 차이점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스티븐 킹의 서사에서 드러나는 친숙한 스타일은 공포영화의 장르적 성향과 거의 일치한다. 대개의 호러영화는 정상이나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캐릭터들을 초자연적이거나 끔찍한 사건에 몰아넣으며 사건을 진행시키고, 그 과정에서 은유적 공포를 생성한다. <그것>이 그러하듯 말이다.
세밀한 공간 묘사가 완성한 공포
원작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학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은 소년’의 이야기라 한다. 그 사건 이후 작가는 광대의 외형을 가진 페니와이즈가 겁먹은 사람들을 통치하는 데리 마을에 대한 글을 적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데리가 현재 스티븐 킹이 거주 중인 메인주의 뱅고어를 모델로 삼았다는 데 있다.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애정 어린 마을을 작가는 공포의 원천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영화 <그것>에서 데리는 마치 하나의 인물처럼 묘사되는데, 카메라는 거대한 하수구로 연결된 마을의 모습을 어른들의 시선을 배제한 채 온전히 아이들의 시선으로만 그려낸다. 페니와이즈의 보이지 않는 반쪽이 이 전체적 공간을 통해 보완된다. 잠재된 마을의 지배자인 페니와이즈는 지하의 연결망을 통해 스스로의 통치 기반을 마련한다. 특정 모습이 아닌 부정형의 형태를 지닌다는 면에서, 이 악당은 부기맨을 원류로 삼은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메인 캐릭터는 ‘광대’에 집중된다. 최근의 대중문화에서 악마 같은 광대의 모습은 꽤나 명확한 전형성을 얻은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미국식 공포영화가 사회현상과 융합되어 해석된다는 면에서, 이 캐릭터는 ‘킬러 광대’라 불렸던 연쇄살인범의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동시에, 영화사 초기의 고전 호러물에서 론 채니가 보여주었던 ‘슬픈 광대’의 이미지를 생각나게 한다. 두터운 화장에 가려진 얼굴 표정과 과장된 신체 표현, 그리고 하얗고 빨갛게 그려진 색채의 과도한 배열이 극단적인 공포의 아이러니를 완성한다. 생각해보면 론 채니 시대의 광대는 흑백영화의 질감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그가 분했던 빨간 광대의 코는 암흑의 스크린 속에서 짙고 옅은 회색으로만 표현될 뿐이었다. 이와 비교해 이번 영화 속 광대의 붉은 빛이 ‘빨간 풍선’에 초점을 맞추어 분리된 것은 흥미롭다. 영화는 어른이나 아이에게 악몽을 불러일으키는 주술의 장치로 알베르 라모리스의 <빨간 풍선>(1956) 속 이미지를 빌려온다. 최근 영화에서 빨간 풍선은 마치 광대와 같은 유행 아이템처럼 사용되는데, 예컨대 <바닐라 스카이>(2001)의 회상 장면은 대놓고 라모리스의 영화를 빌려 썼으며, 허우샤오시엔의 리메이크는 풍선 모티브에 공감해 작업을 시작했다. 실제로도 광대보다 훨씬 보편적으로 ‘풍선’은 유년 시절의 막연한 행복감에 대한 상징성을 품고 있다. 때문에 50년대가 되었든 80년대가 되었든, 작품이 지닌 과거에 대한 복고적 이미지의 환기 자체가 서사 전략이 된다. 이때 ‘복고’의 전략은 그 본래의 의미가 지칭하듯 일차적 회귀로서 복잡한 반전이나 파괴를 포함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큐브릭처럼 장르적 장치를 이중으로 활용하거나 비극의 실제 원천을 응시해 사회적 현상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스티븐 킹의 원작은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미국발 대중문화 코드의 주인공
서론이 길었다. 영화 <그것>은 대개의 고전적 공포영화가 그렇듯, 정통 비극의 특징 몇 가지를 과감하게 삭제하고 생략해서 스스로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작품이다. 비견하건대 큐브릭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 우리는 영화 플롯이 지닌 인과관계의 역할을 과감히 무시하고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작품은 언뜻 선형적 서사의 표본처럼 보이지만(소설의 비선형성은 영화에서 더욱 축소된다), 캐릭터의 몫을 줄이거나 축소, 또는 캐릭터의 역할을 공간으로 이양시키며 공포의 감정을 끌어낸다. 이처럼 원론적인 과정이 공포영화 최고의 미덕인 감정의 직접적 경험을 불러온다. 흔히 호러영화에서 괴물이 만들어내는 사건이 참혹할수록, 그가 출현하기 이전의 사회가 지닌 안정성이나 이상적 성향이 강조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이를 수 있는, 이른바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가 대비되는 과정을 통해 ‘진짜’ 추구해야 할 이상향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히치콕의 <싸이코>(1960) 이후, 혹은 스필버그의 <죠스>(1975) 이후 대부분의 현대식 미국 공포영화는 이러한 법칙 아래에서 비평적 관점을 공유하였다. 현실을 맥락 삼아 쉽게 해석 가능한 알레고리를 제시해준 것이다. 그렇지만 안드레스 무시에티의 <그것>은 그런 관점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피사체를 노골적으로 가까이에서 담으면서, 스스로가 지닌 풍자적 성향을 서서히 줄여나간다. 심지어 유치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놀라는 것, 다시 말해 로 앵글로 아이 시점을 통해 지속적으로 공포를 경험하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그것>은 공포영화가 벗어나지 못하는 그리스 비극의 전형성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고의적이지 않은 과실을 겪는 주인공의 불행을, 관객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성적 평가를 멈춘 채, 그렇게 뇌의 활동을 잠시 멈춘 채로 우리는 이 작품이 주는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해야 한다. 바로 그 순간, 영화가 내미는 비극적 과정의 목적이 혼란이나 파괴를 향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명확해진다. 어쩌면 하룻밤의 디오니소스적 도취를 통해 내일은 더욱 건강한 도시가 될 것임을, 이제는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 벤의 키스를 받은 베벌리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눈을 뜰 때 ‘그것’의 코처럼 보이던 빨간 풍선이 마냥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수구를 둥둥 떠다니는 아이들 중 하나가 땅으로 정직하게 정착하는 순간에, 공포의 연쇄가 안도로 변하며 영화 전체의 리듬을 완성한다. 끊임없이 폭주하는 공포의 변주 사이에서 관객은 일상적 우여곡절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다. 반전이라면 반전이랄 수 있는 베벌리의 회귀를 통해 스티븐 킹이 바라보는 데리 마을의 본질이 실상 공포에 있지 않다는 점 또한 증명된다. 어쩌면 그가 내미는 공포를 즐기는 것 자체가 스티븐 킹 소설의 가장 위대한 목표인지 모른다. 술에 취했던 지난밤의 기억을 통해 밝아오는 아폴론의 태양은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안드레스 무시에티에겐 조금 섭섭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스티븐 킹이다. 올해 미국발 대중문화 코드의 주인공을 스티븐 킹이라 칭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