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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범>이 재현한 공백의 이미지를 따라가보다

표면의 심연

사운드의 영화라고 하지만, <장산범>이 끝난 뒤에 또렷이 남는 것은 거대한 암흑을 품은 듯 보이는 구멍이다. 구멍은 소리로 주의를 끈 뒤 사람들을 현혹하고 어떤 것은 삼켰다가 도로 내뱉고, 다른 것은 삼킨 뒤 돌려주지 않는다. 구멍은 메워지거나 허물어지길 반복하며, 또 다른 사물로 변주된다. 온갖 소리를 삼키는 공백을 어떤 의미로 채우는 대신, 일단 영화에서 구멍이 재현되는 방식을 통해 <장산범>이라는 하나의 여정을 감당해보려 한다.

공백이 불러온 또 다른 공백

구멍의 탄생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한밤 중에 차를 몰고 외딴곳으로 향하는 한쌍의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는 음주운전을 하던 중 사고로 개를 죽인다. 남자가 죽은 개를 트렁크에 싣는데, 그 안에는 온몸이 포박된 여성이 있다. 다시 차를 몰아 어느 폐건물에 당도한 이들은 삽으로 벽을 헐어 커다란 구멍을 낸 뒤 방금 숨이 끊어진 여자와 죽은 개를 구멍 속에 넣어 봉한다. 떠나는 두 사람의 모습 위로 죽은 여성의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불현듯 깔린다. “여보” 하고 부르는 나지막한 음성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다를 바 없고 실제로도 그렇게 들린다. 화면 속 남녀가 그 소리에 반응하면서 소리는 내화면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교정되지만, 어쩐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같다는 꺼림칙한 느낌이 잔상처럼 남는다. 소리는 단순히 영화 내부의 교란물일 뿐만 아니라 외화면과 내화면 사이에 일시적인 혼재를 불러오며 관객을 교란한다. 구멍이 남녀를 삼키는 것으로 시퀀스가 끝을 맺는 순간, 관객은 최초의 목격자 자리에 앉는다.

오프닝 시퀀스가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벌어진 미스터리였다면 다음 숏에서 영화는 이와 대조적인 일상적인 공간으로 점프한다. 구멍은 이제 일상화되고 인간화된 포괄적인 공백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처음에는 치매를 앓고 있는 희연(염정아)의 시모 순자(허진)의 멍한 표정으로 드러난다. 순자는 한순간 소리에 사로잡히기 전까지 내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공백은 늘 지켜보는 시선을 요구한다. 창밖에서 근심 섞인 눈으로 순자를 바라보는 희연에 의해 순자의 텅 빈 기억은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희연은 순자를 위해 남편, 딸과 함께 장산으로 이사를 떠나기로 한다. 그녀가 시모의 회복을 위해서 애쓰는 진짜 이유가 실종된 아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라는 사실은 좀더 뒤에 드러난다. 그러니까 그 순간 희연이 본 건 순자가 아닌 순자의 텅 빈 기억, 더 구체적으로는 시모의 기억 속에 담긴 아들의 행방일 뿐이다. 공백은 또 다른 공백을 불러들인다. 일종의 맥거핀처럼 등장한 개를 잃어버린 남매는 또 다른 공백을 파생시키는 존재인 동시에 희연의 가족을 태초의 구멍 속으로 불러들이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희연이 구멍을 마주한 순간, 인간에게 내재한 공백과 구멍의 이미지는 조우한다.

돌연 낯설어지는 일상

희연의 이야기가 전개된 이후 사람을 홀리는 소리의 정체 역시 일상적인 것으로 옮겨온다. 가족이 처음 집에 당도한 장면은 롱숏, 부감숏을 통해 거리감이 강조된다. 시선의 주인을 상정할 수 없는 관찰자숏은 영화에 불길한 기운을 불러온다. 시선의 주인은 차라리 영화 속 눈먼 무당이며, 그 자체로 시선의 공백을 야기한다. 불안한 기운은 희연의 딸 준희가 건물 밖 계단에 앉아 혼자 노는 모습을 부감으로 보여주는 장면에서 고조된다. 준희는 그저 자신의 말을 거울처럼 되돌려주는 게임기를 가지고 놀 뿐이다. 그러나 이 게임기가 번역하는 소리의 체계는 오프닝숏에서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구멍의 체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단지 비현실적인 설정이라고만 치부됐던 오프닝 시퀀스는 이렇듯 가장 일상적이고도 현대적인 차원에서 번역된다.

보이지 않는 소리의 주인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미스터리한 소녀(신린아)를 통해서다. 희연의 집에 머물게 된 소녀가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가 준희의 목소리를 따라 “내 이름은 준희야” 하고 말할 때, 그 목소리에는 이제까지 어둡던 소녀의 분위기와는 다른 명랑함이 깃들어 있어 섬뜩하다. 소녀의 음성과 동작이 마치 게임기의 반복처럼 감정이 담기지 않은 기계적인 것이라고 인식되는 탓이다. 소녀의 등장으로 희연의 집은 구멍난 폐가만큼이나 미지의 공간으로 변한다. 이제 공백은 일상의 사물들, 특히 거울을 통해 이미지화된다. <장산범>에서 거울이 쓰이는 방식은 하나의 통로이자 매개다.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되비추는 거울에 이면이 있다는 설정은 인간의 분열된 정체성을 암시하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인물의 정체성이 분열되었기 때문에 거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거울이 적극적으로 분열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분열된 정체성은 당사자의 자기 의심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의심을 불러오기 위해 존재한다. 희연이 준희를 찾으며 옷장 문을 여는 장면에서 정작 관객을 놀라게 한 건 옷장 속 무언가가 아니라 옷장 문 안쪽에 붙은 거울에 희연의 옆얼굴이 돌연 나타날 때의 낯섦이다.

이야기 밖에서 끌어온 사건의 단서

영화적 강렬도로 따지면 이준혁이 연기한 사내나 완벽한 변신의 순간을 보여준 순자가 장르와 꼭 맞는 인물일 텐데, 이들이 광기를 드러낼 때 영화가 찬찬히 쌓아온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공포와 멀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르적인 인물과 일상적인 톤의 불화를 굳이 흠으로 들춰내고 싶지 않은 이유는 온갖 대조적인 것이 들끓는 그 간격만이 영화가 재현하고자 한 거의 전부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희연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인물인 소녀가 관객에게 두려움을 주는 이유는 사내와 순자의 장르적인 변신이 소녀의 변신 가능성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겁에 질려 피신한 소녀에게 희연이 다가가 위로하는 장면에서 소녀가 방어의 의미로 손에 쥔 뾰족한 거울 조각이 언제든 희연을 찌를 수 있다는 사실은 장면에 긴장감을 일으킨다. 이때 울부짖는 소녀의 목소리만큼은 아무것도 흉내내지 않은 자신이라는 느낌을 준다. 후에 소녀는 오히려 자신과 같은 자리에서 우는 준희를 희연의 자리에서 위로한다. 이것은 흉내내기의 명백한 전복이자 진짜와 가짜의 위치 전복이다.

희연과 소녀의 관계를 모성이라는 키워드로 훑는 것은 가능하지만, 딸 준희를 염두에 둘 때 단순히 모성이라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필요한 건 해석이 아니라 표면이나 허깨비에 불과할지라도 기꺼이 소리에 홀리기로 결심한 희연의 선택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희연이 소녀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A.I.>(2001)에서 데이비드(할리 조엘 오스먼드)의 감정이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과정과 흡사하다. 다만 데이비드의 감정은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힘이 있었다면, 소녀는 극 바깥의 관객보다 오직 희연의 감정을 위해서만 복무하는 것 같다. 희연의 결정이 관객에게는 하나의 공백처럼 인식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희연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서사 바깥 현실의 프레임을 통해 희연의 선택을 재인식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영화가 제작될 당시에 더욱 생생했을 세월호 참사다. 무리한 끌어들이기라는 것을 알지만, 한국의 공포영화나 스릴러 장르가 당대의 이슈에 특히나 민감한 장르라는 것을 떠올려본다면 우리가 공유한 하나의 공백으로서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리라고 본다. 한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라 할지라도 선험적으로 체감된 연결의 감정은 희연의 선택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다. <장산범>은 결국 영화 바깥의 사건으로 채워야만 완성되는 불완전한 모자이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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