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를 비평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처음부터 완전한 자기 비평을 내놓고 있다. 존 케이지 이후 음악을 하는 컨템퍼러리 밴드에 걸맞은 과감한 노이즈 사운드를 배경으로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할 때마다 뜨던 경고 문구를 연상시키는 촌스러운 활자체의 붉은 글씨가 화면을 뒤덮는다. ‘본 영화는 전체적으로 볼륨이 균일하지 못함, 당신의 불편함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은유하려는 영화적 시도.’ 앞으로 펼쳐질 영화와 음악의 조악한 실수를 예고하며 ‘즉흥성과 오리지널리티’로 퉁친다. 혹시 내가 저런 문구를 구사한 적은 없을까 등골이 오싹해지는 저 비평은 밴드 밤섬해적단의 앨범을 인용한 자기 조롱인 동시에 자신의 영화에 관한 후일의 비평을 미리 조롱하고 있지는 않은가. 감독은 단순한 인용이든 의도적인 삽입이든, 자막은 꿈보다 해몽 격의 비평을 자기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열렬히 파괴한다. 여기에 덧붙는 모든 해석은 일종의 사족이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필요한 건 해석이 아니라 차라리 해부다.
영화에 관한 평에서 종종 발견되는 공통적인 인상은 영화에 담긴 다양한 방식과 함의를 일종의 새로움의 증거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움은 아마도 이 영화와 가장 먼 단어 중 하나일 거다. 영화는 새로움의 성전이 아니라 온갖 낡은 것으로 기운 패러디다. 음악 다큐멘터리라고 치면 한 인디밴드의 투어 공연을 담은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YB가 미국으로 워프트 투어를 가고(<나는 나비>), 친구 스컴레이드가 도쿄에 갈 때(<노후 대책 없다>) 밤섬해적단은 국내 투어, 그것도 망한 장소만 돌아다니는 괴상한 투어를 벌인다. 영화에서 밴드의 첫 공연 장소로 공연이 끝나면 헐려 사라질 망한 건물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니까 영화는 밴드의 망한 장소 투어기이고, 그 자체로 원정 투어 공연 다큐멘터리에 관한 패러디다.
이들의 투어기는 재개발이나 젠트리피케이션 등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으나 이들의 공연이 적극적인 연대의식의 발로라고 보기 힘들고 만든 이들 역시 이런 주장을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의 의식은 오히려 문제적이다. 폐허 직전의 고려대 건물에서 공연에 쓸 드럼 스틱 대용 몽둥이를 구하면서 “신난다”라고 말하거나, 서울대 총장실 점거 현장에서 인터뷰 중이던 드러머 권용만이 “무대에서 공연할 때는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았는데 이런데(투쟁 현장) 오면 사파리에 온 것 같다”고 말하며 인터뷰어에게 카메라를 돌려 자신을 인터뷰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여기에서 그들이 의미와 유희 중 어떤 것에 더 초점을 두고 있는지 묻는 것은 의미 없다. 그들에게는 의미가 유희의 이유고, 유희가 의미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음악 다큐멘터리의 일종으로 영화를 볼 때 또 다른 특이한 지점은 밤섬해적단이 현장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돌연 음원 가사를 영상화한 푸티지로 넘어가버릴 때다. 궁금한 것은 정윤석 감독이 푸티지를 선정하거나 영상을 만든 방식보다는 공연에서 유독 노래를 뚝 잘라내 영상화해 보여주기로 정한 이유다. 이런 태도는 몇몇 음악 다큐멘터리가 음악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이거나 공연 실황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카메라로 옮길 수 있다고 믿는 태도와 정반대에 있다. 정윤석의 영상은 가사가 거의 들리지 않는 밤섬해적단 음악의 친절한 번역서 노릇을 하는 동시에 현장에 선 영상의 한계를 말하려는 것일까.
극단까지 침투해 논리를 파괴한다
조금 다르게 이야기해볼 수도 있겠다. 감독이 오직 언어와 말에 승부를 걸고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이다. 밤섬해적단의 태도는 투쟁 현장의 구경꾼을 가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망한 세상을 견디는 이들의 작전 원리에 가깝다. 이 점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그들의 노래가 아니라 그들이 공연에서 지껄이는 말이다. 영화는 이들이 현장에서 들려준 노래 대신 공연 현장 근처를 어슬렁거리거나 즉흥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과정, 혹은 공연 시작 전 멘트를 공들여 담는다. 특히 이들의 멘트는 힘내시라는 립서비스에 가까운 멘트와 달리 도발적으로 청중의 귀를 낚아채는 성질의 것이다. 스스로 밝히듯이 노래는 그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시작된 거다.
자신들은 랩에 가깝다고 자평했으나 판소리의 아니리처럼 들리는 그들의 말은 묘하게도 공연의 필수 구성 요소처럼 느껴진다. 말은 그들 음악의 중요한 원리를 슬쩍 노출한다. 이를테면 서귀포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 현장에서 밤섬해적단은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생겨야 돼. 그래야 경제가 발전하고…”라는 둥 해군기지 건설 찬성 진영의 논리를 그대로 읊는다. 여기에 “그럼 철원 경제 쩔겠네”라는 말이 덧붙여지자 여기저기 박장대소가 터진다. 한·미 FTA 비준 동의안 상정과 관련해 여의도를 습격한 현장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말을 똑같이 반복한다. ‘옳은 것은 반대가 심해도 통과시켜야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유영철 같은 의지’다. 이는 단순히 농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자신들의 노래를 그날의 현장 상황에 맞게 즉흥 번역한 해설이다. 이들은 도발적인 메시지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뒤, 유예해둔 실제 의도를 후에 드러내는 방식으로 하고 싶은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들의 논리는 미러링이 아니라 상대 진영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서 그 논리를 파괴하는 데 있다. 그러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의 뇌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상대방의 뇌 안으로 잠입해 뇌관을 파괴하는 것이 이들이 구사하는 작전의 실체다.
밤섬해적단의 조롱이 결국 자기 조롱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기꺼이 흙탕물 속에 몸을 던져 구른다. 그들의 발언은 똥오줌이 묻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기에 관객으로선 조롱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것이 당연하다. 영화의 귀결점이 밤섬해적단의 프로듀서이자 사진작가인 박정근의 우리 민족끼리 리트윗 관련 구속 사건인 것은, 밴드의 위기와 해체를 말하기 위한 서사상의 흐름이기보다는 이들이 조롱으로 갈 수 있는 최극단을 밟았고, 그곳이 현재로서는 북한이란 점은 말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 사회 레드 콤플렉스라는 이념의 문제는 다시 지리적인 문제와 만난다. 파괴되는 공간의 시대에 인간에게 주어진 무한대의 공간을 대리한 건 인터넷, 구체적으로 SNS인데, 박정근의 사례에서 볼 때 북한은 무한대의 공간에서 금지된 거의 유일한 곳이다. 이들이 북한을 말하는 것은 그들의 이념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이 부딪치는 법정은 언어를 가지고 노는 그들이 설 수 있는 최상의 무대다. 사운드로 대체된 법정 장면에서 화면을 채우는 건 김정일이 등장하는 풍자적인 그래픽이다. 이는 밤섬해적단의 노래와 함께 보여주던 푸티지 영상의 일종으로 이 역시 밤섬해적단 공연의 일환임을 드러내는 표식이다. 그러나 이들의 무고함의 증명은 법정 진술 대신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뤄진다. 박정근이 보컬 장성건의 컨셉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청-청 패션에 화염병을 든 장성건이 자기 사진을 모니터하며 “좆나 빨갱이 같애”라고 말했다가 “좆나 애국 청년 같애”라며 잠깐 사이에 상반되는 표현을 번복한다. 그저 말실수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빨갱이나 애국이라는 단어가 그저 같은 알맹이에 붙은 두개의 프레임일 뿐임을 증명하기에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다.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위치를 고수하면서도 에두르지 않고 가능한 한 극단까지 침투하는 것, 그것이 밤섬해적단이 보여준 현재적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