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영화감독이 소수자를 제재로 삼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소재 착취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유혹을 번번이 뿌리치기 어려운 건 무감한 일상을 벗어나 있는 이들이 운명처럼 지니고 있는 긴장과 갈등이 영화적 상상력을 추동하기 때문일까. 그 유혹에 더 취약한 쪽은 데뷔하는 감독들인 듯 하다. 빠듯한 제작 여건으로 극적 긴장감을 담보해야 하고, 감독 개인의 세계관을 탈탈 털어 만들어온 단편과 달리 세상을 보는 성숙한 시선도 담아야 할 것 같은 ‘어른 되기’의 압박감도 느끼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 소재를 발굴해야 한다는 공명의식은 미지의 타자로 시선을 돌리게 하고, 그들을 부지런히 취재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로 이어진다(나 역시 그렇다). 이러한 연유로 2000년대 초반부터 청년 빈곤과 외국인 노동자, LGBT(성적소수자들을 위한 모임) 등을 다룬 장·단편 독립영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졌으니 독립영화에서만큼은 이들은 더이상 소수자가 아니다. 군상을 이룬 소수다.
지금의 젊은 감독들은 학교에서든 현장에서든 일정한 교육을 받은 이들이 다수다. 윤리적 태도에 대한 기본적 의식은 공유하고 있다. 소수자를 영화의 제재로 선택했을 때 소수자의 고통을 대상화할지도 모른다는 문제의식은, 감독 개인이 얼마나 진중한 태도를 가지는가와 같이 간다. 그 진중함이 도리어 독이 되어 주춤거리다 마는 영화들도 보게 된다. 특히 그 주춤거리는 태도는 소수자가 가진 고통과 그 이면의 폭력성을 애매하게 처리하는 데 일조한다. 보여주기는 하되 덜 보여주거나 가려서 보여주는 식이다. 비평의 지면에선 이런 미학적 꼼수를 지적하거나 소수자를 장르적 장치로 유인한 후 클라이맥스에서 폭죽처럼 터뜨려 소거시킨다는 글이 자주 보인다.
이 때문일까. 이들을 대상화하지 않으려는 젊은 감독들의 노력은 관객에게 이들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설득하려는 인물이 아니라 공감을 이끌어내는 인물로 대치시키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최근 이현주 감독의 <연애담>(2016)이 그랬다. 소수자를 그대로 놓아두고 바라보는 영화 내적인 시선은 강직하고 섬세하다. 이와 달리 조현훈의 <꿈의 제인>(2016)은 소수자를 다룬 영화 중 드물게 영화라는 매체로 성찰한 방식을 구현한다. 영화의 형식논리를 가지고 노는데 그 감각이 젊고 정확하다.
순차적 인과관계를 의도적으로 비틀다
영화가 끝나고 다시 소급되는 타이틀과 엔딩 시퀀스를 제외하면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서사 단락으로 구분된다. 가출 소녀 소현(이민지)은 오빠 정호(이학주)와 모텔에서 지내다 정호가 도망가자 홀로 남는다. 소현은 정호가 자신을 버리고 간 모텔에서 자살을 기도하는데, 이때 구원자처럼 제인(구교환)이 찾아와 소현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제인은 트랜스젠더다. 제인이 대리 엄마로 있는 가출 팸에는 이미 지수(이주영), 대포(박강섭), 쫑구(김영우)가 살고 있다. 제인은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쭉 이어지는데 행복은 드문드문인 이런 개 같은 인생 혼자 살아 뭐하냐”며 아이들을 보살핀다. 그럼에도 제인은 너무 잦고 길게 이어지는 불행의 구간에서 자살한다. 소현과 아이들은 제인을 산에 묻고 나름의 장례를 치른 후 헤어진다. 산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모습 위로 영화의 문을 열기도 했던 소현의 내레이션이 다시 들려온다. “사실 저는 지금 또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 이제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거예요.” 앞선 자기고백적 내용과 달리 영화 속 처지가 대입되어 발화하는 이때의 내레이션은 첫 번째 서사 단락을 끝맺는 구두점이 된다.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의 첫 장면은 소현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화면의 톤이 툭 떨어진 상태에서 누워 있는 소현의 등을 거칠게 발길질하는 나경(박경혜)의 모습에서 관객은 소현이 제인의 팸을 떠난 후 험악한 팸으로 이동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새로운 팸의 구성원이 보이는데, 제인 팸에서 함께 지냈던 대포와 쫑구가 섞여 있다. 소현이 이들과 함께 팸을 옮겼을 수도 있기에 이러한 인물의 반복이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하지만 병욱(이석형)이 대리 아빠로 있는 이 새로운 팸에 지수가 새로운 멤버로 들어오면서부터 영화의 서사가 꼬이기 시작한다. 두 번째 단락에 등장하는 지수와 소현은 초면이기 때문이다.
앞의 단락이 과거고 지금의 단락이 현재라면 지수가 병욱의 팸에 들어왔을 때 소현과 지수는 초면이 아니라 재회하는 설정이어야 직선적 서사 시간에 들어맞는다. 관객은 브레이크를 걸고 영화의 구조를 재정립한다. 지금 보고 있는 두 번째 단락을 소현과 제인이 만나게 된 과거, 그러니까 제인 팸에 들어가기 이전의 과거로 구조를 재정립한다. 그래야 지수와 소현이 초면인 것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과거라 여겼던 첫 번째 단락이 미래가 되고, 현재의 두 번째 단락이 과거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영화의 한 시간 너머 병욱 팸에서 지내던 지수가 자살함으로써 이렇게 정리되던 논리적 인과관계도 무너진다. 지수가 죽었으니, 미래라고 정립한 영화의 첫 번째 단락에서 지수의 존재는 성립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수는 제인과 똑같이 투신했다. 제인의 사체를 감쌌던 담요, 제인을 담았던 트렁크, 제인을 묻은 동일한 장소 등도 반복되는 미장센이다. 이 영화를 서사적으로 정렬하는 길을 잃은 관객은 주인공 소현이라는 인물에 방점을 두어, 제인 팸과 병욱 팸으로 병치되는 이 두 단락이 꿈과 현실의 교차거나, 환상이라는 추상의 영역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이른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관객의 이러한 끈질긴 추론 의지도 꺾인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순차적 인과관계가 무용하도록 설계한 감독의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비이원적 세계가 획득한 거리 감각
영화의 첫 번째 단락, 제인 팸의 주요 공간이던 제인의 집은 영화의 후반부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 집은 제인과 함께 이태원 바에서 일하던 동료 주희(박현영)의 집으로 설정되어 있다. 수현은 어떤 기시감도 느끼지 않고, 주희 집에서 하루를 묵는다. 이쯤되면 관객은 시간적, 공간적 인과관계를 수렴하지 않는 비이원적 구성이 이 영화의 세계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는 가장 명확한 구두점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소현의 목소리로 발화되던 “제가 처음 배운 말은 거짓말이었대요. 저는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거예요”라는 내레이션을, 제인이 자신의 공연에서 똑같이 반복하는 순간이다. 관객은 소현이 제인인지, 제인이 소현인지, 지수가 제인은 아닌지 주춤거리게 되지만, 영화는 이런 인과적 물음조차 관습적인 반응이라고 일축한다. 관객은 일종의 무력감을 느낀다. 나는 이 무력감이 불쾌하지 않았다. 상징의 구태의연함이나 게으른 실험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설계가 형식의 일관성을 갖추려는 노력의 일환처럼 보였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예술적 방법론으로까지 여겨졌다.
우리는 소수자를 영화적 인물로 택했을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윤리적 태도의 요구를 늘 영화 안에서 찾았다. 소수자-감독-관객의 삼자대면의 비평적 거리를 영화 안에서만 고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수자를 제재로 택하는 많은 영화는 정서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일원적으로 닫힌 세계다. 그 안전한 세계 속에서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통감할 수 있다는 착각이 든다. 하지만 <꿈의 제인>은 인과의 언어가 통용되지 않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히고 반복되는 인물과 배경, 소품 등의 요소로 비이원적 세계를 만들어놓았다. 그 세계에서 인물과 동일시하려는 우리의 관습적인 태도는 먹혀들지 않는다. 그들과 동일시하려는 우리의 경험은 매번 튕겨진다. 나는 이 멀찍한 거리 감각이 외려 정직한 각성처럼 느껴진다. 영화 외연의 형식논리로 만들어낸 젊고 정확한 비평적 거리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