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시민>(2016)의 박인제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통제 불가능한 정치적 세계의 메커니즘 속에서 인물이 보여주는 ‘리액션의 연쇄’를 꼼꼼히 기록하는 일이다. <특별시민>이 나선형의 매끈한 극적 구조보다는 에피소드의 나열처럼 구성된 것도 이러한 이유다. 도심 한복판에 싱크홀이 발견되었을 때, 그리고 아내의 고가 미술품 구입이나 자동차 사고 등이 폭로되었을 때, 그리고 심혁수(곽도원)로부터 비롯된 일련의 정치적 음모와 압박이 가해져올 때마다 변종구(최민식)가 보여주는 리액션 하나하나가 모여 변종구의 종합적 형상이 완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변종구의 선택/리액션이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것에 가깝지만 ‘선거의 결과로 평가받는 정치인’으로서는 최상의 선택/리액션이라는 점이다. 이 단순 도식을 극단화하면 최상의 정치인은 최악의 인간이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겠다. 변종구의 리액션 하나하나가 모자이크되어 완성된 형상은 ‘괴물’의 모습이다. 변종구(와 한국 정치의 메커니즘)의 모습이 괴물의 형상으로 완성될 무렵, 박인제는 전체적으로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투숏과 미디엄숏으로 인물(들)을 담아내던 영화를 점차 클로즈업의 영화로 전환시킨다(특히 최근 한국영화 중 투숏의 활용에 있어서만큼은 가장 안정적이고 인상적인 영화가 바로 <특별시민>이다). <특별시민>은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변종구의 선택/리액션이 최악으로 치닫기 전까지는 클로즈업을 최대한 자제한다. 이러한 연출 전략은 인물의 감정보다는 그들이 처한 ‘영화적 맥락’과 그 속에서 이뤄지는 ‘선택/리액션의 행위’를 더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변종구의 시장실이나 심혁수가 지휘하는 선거 사무실 등의 미장센에 공을 들인 이유다.
특히 심혁수가 지휘하는 선거 사무실, 그러니까 위와 아래, 또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올라갈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뉜 공간적 구도는, 권력을 향한 욕망이 인물을 어떻게 괴물로 만드는가, 라는 <특별시민>의 주제와 맞닿는다. 이 권력을 향한 욕망이 변종구나 심혁수가 보여주는 리액션의 동력, 그러니까 그들이 ‘똥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이유다. <특별시민>에서 이러한 주제를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은 심혁수가 구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일 것이다. 일그러져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든 형상, 그것이 바로 정치/권력이라는 똥물에 빠져 괴물이 되어버린 자들의 형상이다. 심혁수가 자신이 그토록 집착하던 구두(선반)에 깔려 죽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통적이면서도 예외적인 정치영화
최근 한국영화에서 정치인이나 권력자를 괴물로 그리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들만큼 욕하고 냉소하기에 적당한 이들이 또 어디 있겠는가? 최근 한국영화는 정치와 권력의 세계를 포르노그래피적으로 다루면서 그 세계의 인물을 변태나 괴물처럼 그리곤 한다. 물론 정치와 권력의 감춰진 세계를 카메라의 시야에 노출시킬 때, 그 만남에는 관음증적인 쾌락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외설성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최음제가 다름 아닌 ‘폭력’과 ‘섹스’다. 카메라와 관객이 맺는 이 외설적 관계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화가 <내부자들>이었다면, <특별시민>은 그 외설성으로부터 한 발짝이라도 떨어지기 위해 애쓰는 작품이다. <특별시민>은 ‘섹스’와 ‘폭력’과 거리를 둔, 그렇기에 그 흔하디흔한 ‘묻지마 파티’와 ‘카체이싱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정치영화다. <특별시민>은 오로지 ‘권력을 향한 욕망’이라는 정치적 동력이 만들어낸 권력자/괴물의 형상을 담는다는 점에서 정통적이면서도, (최근 한국영화의 일반적 경향에서 벗어난) 가장 예외적인 정치영화다.
기본에 충실한 영화를 만드는 것
<특별시민>은 변종구의 리액션을 관찰해왔던 박경(심은경)의 리액션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하지만 변종구의 영화였던 <특별시민>이 박경의 선택/리액션으로 넘어가는 이 대목은 뭔가 부자연스럽다. 박경이 선거의 어두운 터널을 관통하며 경험한 내용은 관객이 <특별시민>을 통해 확인한 ‘정치 관찰일지’와 다르지 않고, 그렇기에 그녀의 선택/리액션은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물론 박인제는 박경의 정치적 선택/입장으로 관객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썩어빠진 정치적 메커니즘을 바꾸는 것은 (관객/시민의) 리액션임을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결말은 현실적 에피소드를 촘촘히 쌓아가던 영화가 갑자기 이상적 결론으로 비약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권력은 유권자가 정치인에게 위임한 것에 불과하다는 이 결론에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겠으나 그렇다 해도 이는 너무나 교과서적인 결론이지 않은가. 제아무리 옳은 말도 교과서에 실리면 따분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특별시민>이 갖는 ‘정치적 입장’은 박경의 선택에서가 아니라 박인제 감독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박인제 감독은 관객의 관심을 한방에 휘어잡을 수 있는 자극적이고 임팩트 있는 사건이나 장면보다는 사건과 이미지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씨네21> 1102호 기획 ‘<특별시민>의 특별한 점’에서 송경원 기자가 이미 지적했듯, <특별시민>은 “비틀린 캐릭터들의 욕망을 충실히 표현하고 관찰”할 뿐만 아니라 “다소 도식적일지라도 매 장면과 캐릭터마다 의미화된 소품과 장면들”을 통해 “드라마와 캐릭터들을 촘촘한 그물처럼 엮어나가는”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박인제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치’다. 물론 박인제의 이러한 고집은 영화적 리듬을 느리고 평면적으로 만드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미친 속도감으로 몰아치는 데 급급한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에 비춰보면, 이는 관객(과 투자자)의 선택을 주저하게 만드는 미련한 취향일수도 있다.
하지만 박인제 감독은 그렇게 기본에 충실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옳은 가치’라는 믿음을 거두고 싶어 하지 않아 보인다. <특별시민>은 ‘영화적 유행’ 대신 ‘영화적 가치’를 고민한 작품이다. 현실 정치인에게 ‘정치의 가치’보다 그저 유권자의 머릿수가 더 중요해질 때 정치인/권력자는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는 영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타와 비문으로 가득한 소설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 라는 질문을 영화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또는 정치의 가치를 잃고 괴물이 되어가는 변종구를 비판적으로 관찰하는 <특별시민>이 그와 동일한 길을 간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모비딕>과 <특별시민>만 놓고 본다면, 박인제는 자신의 작품이 그러한 영화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하는 감독이다. 이러한 면에서 어쩌면 <특별시민>은 최근 한국영화 중 가장 미련하지만 믿음직스러운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의 전작이자 장편 데뷔작인 <모비딕>(2011)에 대한 비평에서 박인제의 영화적 태도가 믿음직스럽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그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