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싱글>

‘페미니즘 리부트’란 말이 실감난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터져나온 ‘여혐’ 논의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 문화를 폭발적으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역풍도 만만치 않다. 남성들은 여혐 문화를 반성하기보다는 ‘일반화하지 마라’, ‘역차별하지 마라’라는 말로 발뺌하기 바쁘다. ‘나는 일베를 하지 않는다’는 선긋기는 ‘메갈리아’를 ‘여자 일베’로 규정하고 마녀사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티셔츠 인증사진의 후폭풍은 ‘일베’와 ‘오유’가 어깨동무하는 진풍경을 연출하며, 이 사회의 강고한 남성 연대를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 있어서 페미니즘 열풍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2016년 상반기 동안, 외국영화 <캐롤> <서프러제트> <로렐>, 한국영화 <아가씨> <우리들> <비밀은 없다> <굿바이 싱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가 잇따라 찾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굿바이 싱글>과 <비밀은 없다>에는 성인 여성과 소녀의 연대가 등장한다. 생각해보면 <미쓰 홍당무>(2008)와 <도희야>(2014)도 그러하다. <폰>(2002)이나 <여고괴담4: 목소리>(2005)에서 성인 여성과 소녀가 치정으로 얽혀 죽음을 불러왔던 것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변화가 시대적 조류의 반영으로 읽힌다.

<굿바이 싱글>과 <도희야>, 성인 여성과 소녀의 사회적 연대

<굿바이 싱글>은 기대보다 훨씬 알찬 영화이다. 톱스타 싱글 여배우의 임신 발표를 둘러싼 소동이나 사회적 반응을 잠시 보여주다가, 사실은 여중생의 아이를 입양하려는 것이었다는 반전으로 약간의 감동을 주며 마무리하는 서사를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가짜임신 발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또한 이들이 파국을 겪으며 바람직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매우 진취적이다. 일단 미혼으로 엄마가 되려는 여성에 대한 관점이 세련됐다. <이프>(2000)에서 비뇨기과 여의사(이혜영)에게 호감을 느끼던 남자주인공은 그녀가 미혼으로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문란한 여자’라며 시비를 걸다가 정자 기증에 의한 임신임을 알고는 태도를 바꾸어 돌연 ‘성녀’ 취급을 한다. 남자주인공이 보여주는 괴상한 창녀-성녀 이분법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지만, 영화는 (제목부터) 페미니즘을 표방하고 있다는 오도된 자의식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굿바이 싱글>은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고주연(김혜수)의 임신 발표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좋은 반향을 일으킨다. 용기 있는 여성이자 모성애의 주체로 받아들여지면서 광고 섭외가 폭주한다. 오히려 발표 직전에 사귀었던 연하남의 이미지가 추락한다. 영화는 우리 사회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혼모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선취하여 보여준다.

영화는 고주연이 입양을 생각하기 이전에 손가락질당하는 임신한 여중생 단지(김현수)를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주연은 단지의 낙태를 막으며, 자신이 아이를 키우겠다고 말한다. 단지는 고주연의 제안에 1억원을 달라는 계약서를 내미는데, 이는 <주노>(2007)에서 임신한 앨런 페이지가 입양을 원하는 부부를 직접 선택해 만나는 것만큼이나 똑똑해 보인다. 고주연의 집에 들어온 단지가 임신부로 관리받는 장면은 <씨받이>(1986) 등에서 보아왔던 대리모 장면을 연상시키지만, 둘이 친해진 이후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단지가 주연을 ‘언니’라고 부르며, 함께 남자에게 복수하러 다니는 장면은 경쾌하다. 하지만 허니문은 오래가지 못한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깨지고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았을 때, 영화는 고주연의 반성을 통해 단지가 느꼈을 불안과 공포를 비춘다. 후반부의 감동이 남다른 것은 처참하게 깨진 관계에서 고주연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단지에게 달려가 보호자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단지나 주연 중 누가 아기의 엄마가 될 것인지 묻는 우문에 빠지지 않고 다 함께 대안가족을 이루고 사는 진보적인 대단원을 보여준다.

위기에 처한 소녀를 성인 여성이 돕다가 아예 대안가족을 형성하는 서사는 <도희야>에서도 보았던 것이다. 섬마을의 학대당하던 소녀 도희(김새론)에게 새로 부임한 파출소장 영남(배두나)은 방패막이 되어준다. 폭력에서 도망친 도희가 영남의 집에 깃들면서 둘은 친해진다. <굿바이 싱글>과 <도희야>에는 똑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성인 여성과 소녀가 같은 모양의 선글라스를 쓰고 나란히 누워 선탠을 즐기는 장면이다. 모처럼 자유와 평화를 얻은 두 사람이 정서적으로 동화되었음을 읽을 수 있다. <도희야> 역시 파국의 상황을 맞는다. 도희로 인해 영남이 사회적으로 매장될 위기를 겪지만, 두 사람이 재회하여 함께 떠나는 결말을 보여준다. 도희에게 영남은 멘토이자 애인이며 새로운 가족이다.

<비밀은 없다>와 <미쓰 홍당무>, 성인 여성과 소녀의 정서적 공명

<비밀은 없다>는 국회의원 선거를 배경으로, 후보 딸의 실종에 대한 수사극 형태를 띠고 있지만 관객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비껴나간다. 선거라는 거대 정치는 뒷전으로 밀리고, 영화는 여중생들의 토끼굴로 들어간다. 영화의 초반에 신예 정치인의 부인이자 예쁜 학부모로 보이던 연홍(손예진)은 불과 몇 장면 만에,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쏟아내는 불안정하고 질긴 여자로 재현된다.

영화에서 연홍이 딸의 행방을 좇는 시간은 연홍이 겪는 가혹한 성장의 시간이다. 영화가 들려주는 연홍의 어린 시절은 이질적이다. 그는 영부인을 꿈꾸던 소녀인 동시에, 가수가 되겠다며 가출한 소녀였다. 딸의 행적을 좇은 지 며칠 만에 연홍은 남편의 출세를 위해 내조하던 아름다운 부인에서, 전라도 출신이라 배척받는 존재이자 남편의 지역구에 “근본도 없고 썩어빠진 동네”라고 욕설을 쏟아붓는 완전한 외지인이 된다. 애초에 연홍은 이곳에 속할 수 없는 왕따였던 것이다. ‘항상 머리가 헝클어져 있던 소녀’였던 연홍은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왕따였던 딸의 자취를 좇지만 딸은 주검으로 돌아온다.

연홍은 딸 민진과 미옥이 ‘지니와 오기’라는 밴드를 결성해 ‘무키무키 만만수’류의 음악활동을 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아지트를 찾은 연홍에게 미옥이 들려주는 사건의 진상은 기막히다. 연홍의 남편과 교사의 불륜, 이를 안 소녀들의 협박, 홀로 남을 미옥이 왕따당하지 않도록 시험지를 빼돌리고 돈을 요구했던 소녀들(그 돈이 <굿바이 싱글>에서 소녀의 요구 금액과 같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초반에 믿음이 가지 않던 연홍이 마침내 사건의 실체에 도달하는데, 이는 연홍이 소녀들의 세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거짓말탐지기에서 미옥이 민진을 묻은 것으로 나오지만, 경찰은 이를 간과한다. 아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연홍은 딸의 목소리를 흉내내 인터넷 회사에 전화를 걸어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수만개의 메일을 밤새워 읽는다. 미옥의 말을 통해, 민진과 미옥이 나누었을 내밀한 대화들을 상상하고, 암호 해독하듯 딸의 노랫말을 곱씹는다. 내재적 접근법, 동화 혹은 빙의의 방식으로 연홍은 딸의 무의식을 탐색한다. 정치인의 아내이자 착하고 공부 잘하는 딸의 엄마인 ‘단정한 연홍’에 머물렀다면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착하지 않은 딸’의 진실에 연홍이 다가서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허위의식을 벗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연홍은 민진의 마음으로 미옥을 바라본다. 미옥은 민진과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민진이 준 시계를 차고 있다. 남편을 처단한 후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미옥을 발견한 연홍은 진심으로 민진에게 말하듯 “우리 딸 춥지 않았냐”고 말한다. 다시 태어난 연홍에게 ‘민진=미옥’이 된 것이다. 그러곤 미옥에게서 “엄마는 멍청해서 지켜주어야 된댔어요”라는 민진의 전언을 듣는다. 민진이 아빠와 불륜을 저지른 교사를 협박한 것은 ‘멍청한 엄마’를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민진은 미옥을 어린 시절 연홍에 겹쳐 묘사했었다. 민진의 마음속에서 ‘미옥=연홍’이었던 것이다. 탐문의 과정을 밟으며 ‘연홍=민진’으로 동화되었으니, 결국 ‘연홍=민진=미옥’이 된 셈이다. 이제 미옥이 연홍의 딸이 되어 연홍을 지켜주어야 한다.

요컨대 <비밀은 없다>는 성인 여성이 허위의식을 벗고 소녀들의 세계에 공명하여 내 안에 소녀로 존재하는 자아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써니>(2011)에서 중산층 주부가 된 여성이 자신의 소녀 시절을 영광스럽게 회상하며, 명품 백을 날려 왕따인 딸을 괴롭히던 아이들을 응징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기술된 ‘소녀-되기’이다. <써니>를 지배하는 것은 주류적 욕망으로, 과거를 윤색하고 현재의 부와 관계를 증진시키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반성이나 현재의 삶에 대한 타파가 없다. 영화의 결말이 유산 잔치가 된 것은 주류적 욕망의 최고봉이 재산 상속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필연적이다. 반면 <비밀은 없다>를 지배하는 것은 소수자적 욕망이다. 현재의 거짓투성이 삶을 내 손으로 파괴하고, 내 안에 웅크린 소수자-소녀를 만나는 것이다.

성인 여성이 소녀들의 삶에 공명하는 이야기는 <미쓰 홍당무>에 다소 코믹하게 그려져 있다. 소녀로서 남자 선생님을 사랑했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교사가 된 양미숙은 이름 그대로 미숙한 존재이다. 그는 서 선생의 애인, 아내, 딸의 주변을 끈질기게 맴돌다 결국 서 선생의 딸과 맺어진다. 성과 나이를 초월하여, 전교 왕따인 여중생과 함께 환상의 콤비 ‘찐따와 찐따 애인’이 된 양미숙은 무척 행복해 보인다. 영화는 여교사와 학생의 애정을 담지만, 교사와 학생간의 동성애적 치정을 그린 <여고괴담4: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결을 지닌다. 양미숙은 이성애자로도 동성애자로도 보기 힘들고, 심지어 성인 여자로 보기도 힘들다.

영화는 ‘찐따’라는 말로 대변되는 소수자성을 전면에 깔고 있으며, 성인 여자의 내면에 들어 있는 미숙한 자아인 소녀가 외부의 진짜 소녀와 만나 단짝을 이룬다는 독특한 서사를 지닌다. 이러한 서사는 <봉자>(2000)나 <몬스터>(2004)에도 등장한 바 있지만, <봉자>와 <몬스터>가 둘의 결합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렸던 것과는 달리 <미쓰 홍당무>가 경쾌하게 그린다는 점은 큰 차이다. <비밀은 없다>는 주류 사회에 성공한 듯 살아가던 성인 여성이 세계의 허위와 자기 안의 소수자성을 깨닫고 소녀들의 진실과 마주하는 이야기로, <미쓰 홍당무>가 제기한 성인 여성과 소녀의 정서적 결합을 진지하게 발전시킨 영화로 읽을 수 있다.

세대간 연대를 통해 역사가 되기를

이상의 <굿바이 싱글> <도희야> <비밀은 없다> <미쓰 홍당무> 등이 보여주는 여성간의 연대를 <폰>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차이를 알 수 있다. <폰>에서 원조교제로 임신한 여고생은 중산층 가정의 아내 자리를 위협한다. 소녀는 불임인 아내는 가짜이며, 자신의 사랑이 진짜라고 주장하다 살해된다. <폰>에서 임신한 소녀는 불온한 존재이다. 소녀는 성인 여성과 적대적이며, 둘 사이에 연대의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굿바이 싱글>에서 임신한 소녀는 ‘남들보다 빨랐을 뿐’으로 간주된다. 영화는 주연도 이른 나이에 낙태를 경험했음을 암시한다. 주연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소녀를 격려한다. 초반에 얼떨결에 던진 “내 새끼다”라는 말은 진정으로 실현된다. 주연은 소녀와 엄마-되기를 경합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 또는 후견인을 자처한다. 영화는 정상 가정의 틀도 굳이 필요치 않으며, 다양한 가족의 구성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최근 영화에서 성인 여성이 소녀를 학대와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거나, 내 안의 소수자성을 각성하며 소녀들과 정서적 유대를 이루는 것은 의미 있다. 세대를 넘나드는 여성들간의 연대는 새로운 세대의 여성운동이 기존 여성주의자들의 지지 속에서 발흥하고 있는 현재의 담론지형을 간접적으로 비춘다. 남성의 이야기는 역사가 되지만, 여성의 이야기는 에피소드로 여겨져 전승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세대간 단절로 인해 여성운동은 언제나 새로 시작하듯 진행되어왔다. 메갈리아로 인해 터져나온 여성주의의 열기가 기존 여성운동과의 연속성 속에서,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전승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