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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영화비평] 나홍진이 <곡성>에 장치한 서사적 속임수는 어떻게 관객에게 통했나

<곡성>

나홍진은 인간의 짐승성을 난폭하고 야만적으로 파헤친다는 점에서 김기덕이나 고 김기영 감독 못지않게 대담하다. 김기덕만큼 단순명료하지 않고 김기영과 달리 인간에 대한 심리적 접근을 꾀하지 않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 겨우 세편의 장편영화를 만든 감독이지만 조로하는 한국영화계에서 대가 비슷한 대접을 받는 그는 데뷔작 <추격자>(2008)와 이번 영화 <곡성>에서 인간의 짐승성을 두르되 종교적인 외피를 서사에 두르는 작전을 썼다. 종교적 틀을 경유하지 않고 인간의 짐승성을 직선적으로 다뤘던 두 번째 영화 <황해>(2010)는 물론이고 <추격자>에 비해서도 <곡성>은 훨씬 덜 정직하고 너무 멀리 나갔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솔직한 것은 포스터뿐이었다. 미끼를 물되 현혹되지 말라고 권유한 <곡성> 포스터는 나홍진의 속내를 위악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관객이 미끼를 물고 현혹되기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동시에 관객이 현혹되지 않은 채 영화를 비난하는 흥행 실패 재난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으로도 그는 도박을 한 것이고 상업적으로 그의 도박은 성공했으나 그가 던진 미끼는 독이 되어 그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흥행에 실패했던 직선의 영화 <황해>와 그 차기작 <곡성>

<곡성>을 말하기 전에 잠깐 그의 데뷔작을 상기해보자. <추격자>에서 전직 경찰 출신 포주인 엄중호(김윤석)는 자기가 운영하는 윤락업소 여자 김미진을 납치한 범인 지영민(하정우)을 쫓는다. 그는 어떤 공적인 명분으로 범인을 쫓은 게 아니다. 자기의 사업적 이익을 보전할 생각으로 추격전에 나섰다가 김미진의 딸을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그는 도덕적으로 타락했던 이전 삶과 선을 그으며 새끼를 보호하려는 심정을 느끼는 인간으로 진화하게 된다. 그가 상대하는 살인범 지영민은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가끔은 처연한 짐승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는 특이한 인간이다. 지영민이 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지는 경찰 심문으로도 밝혀지지 않지만 엄중호의 사적인 탐문을 통해 드러나는 단서들은 그가 살인하는 심리적 배경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그가 살던 지하 자취방에는 그가 그린 십자가상 그림이 있고 그는 교회 집사 가족을 살해한 후 그 집사의 집에 머물며 창녀들의 머리에 정을 박아 죽였다. 그는 십자가 그림과 조각을 만드는 예술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살인을 저지르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행위를 의식하며 흉내낸다. 지영민은 작은 악마이다.

<추격자>는 이 악마가 마음대로 활약하는 동안 아무런 보호장치도 가동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공적 시스템을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우왕좌왕하는 경찰의 행태가 상투적으로 제시되는 것보다 관객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횡행하는 악에 비해 무능한 공적 시스템을 지시하는 강력한 이미지들이다. 이를테면 엄중호가 부하직원을 데리고 열쇠 꾸러미를 든 채 망원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마구잡이 수색을 하는 황당한 상황에서 카메라는 군데군데 불빛이 나는 산동네 전체를 원경으로 보여준다. 그건 어떤 명시적 단언보다 약육강식에 그대로 노출된 이 나라의 만신창이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채 방치하고 있는 괴물의 아가리 같은 이곳의 잔인한 일상적 광경을 언어로 환언할 수 없는 형태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지영민의 악마적 매력은 모호하게 웅크린 채 드러나지 않지만 그의 잠재적 힘은 강하게 영화 속 현실을 장악하고 있다. 공적 시스템을 집행하는 무력한 사람들과 대비되는 강한 악인은 자기 나름의 반기독교적 의식으로 살인을 미학화한다. 그에 반해 <황해>는 이런 반기독교성을 전혀 드러냄 없이 여자와 돈을 두고 벌이는 남자 짐승들의 연쇄적인 파멸극을 장쾌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전작에 비해 훨씬 투명하게 관객을 향해 돌격하는 영화였다. 그 때문에 이 영화는 <추격자>와 달리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황해>가 직선의 영화였다면 <곡성>은 전작의 흥행 실패를 의식한 듯 곡선의 지그재그로 관객을 농락하는 영화이다.

“중한 게 뭣인지도 모르면서…”

관객을 적당히 어르고 달래며 눙치는 서사적 속임수가 능란한 <곡성>에서 악마의 매혹에 대한 나홍진의 쏠림은 훨씬 두드러진다. 그는 곡성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완전 장악하고 있는 존재로 악마를 묘사한다. 곡성 산중에 사는 일본인/외지인이 무당이었는지, 무당이었다가 죽어 부활한 악마인지, 인간들의 의심과 무지가 그렇게 만들어낸 현혹적인 존재인지 굳이 칸을 치고 묘사하지 않은 채, 영화는 계속 이게 현실인지 초현실인지 헷갈리게끔 적당히 주인공의 꿈 장면을 끼워넣으면서 일종의 맥거핀을 가장한 속임수 놀이를 하고 있다. 이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은 영화의 논리대로라면 미끼를 던진 자의 책임이 아니라 미끼를 문 자의 책임이다. 영화에서 악마로 추정되는 존재가 던진 미끼를 문(것으로 추정되는) 자들은 모두 예외 없이 이성을 잃고 허둥대며 헛것을 보고 살인이나 폭력을 저지르며 심지어 벼락을 맞는 횡액을 겪기도 한다. 곡성에서 벌어진 연쇄적 살인사건의 원인이 독버섯 감염의 효과라는 뉴스가 화면에 나오지만 이건 플롯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곡성>이 오컬트가 되는 것은 특히 주인공 종구(곽도원)가 헛것에 사로잡혀 헛것을 보며 계속 정신나간 짓을 하기 때문이다. 외지인(구니무라 준)의 악마적 정체를 제시하는 초반 장면은 종구의 꿈에 보인 것처럼 그려지며 이후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외지인이 악마로 변한 장면은 종구의 꿈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나중에 결말에서 확정될 악마 이미지의 복선이기도 하지만, <엑소시스트>(1973)에 나오는 고대문명 유적에서 발굴된 악마상과 유사한 외지인의 모습은 종구나 다른 등장인물이 실제로 본 것인지 가상을 본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영화는 알 수 없는 채로 굳이 경계를 가르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한다. 어쨌든 경찰인 주인공 종구는 그렇게 헛것에 홀리기 딱 좋은 성정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경찰의 직분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지만 배짱도 없고 두뇌 회전도 빠르지 못한 무능한 사람이다. 영화가 시작한 후 그는 사건 현장에서 연달아 겁에 질리고 얼빠진 모습을 보이고 주변 사람들의 핀잔을 산다. 종구의 파트너인 성복도 마찬가지다. 그 두 사람은 ‘덤 앤 더머’의 한국판 캐릭터 같다. 눈앞의 상황에 지질하게 구는 그들의 모습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데 그들의 이 바보 같은 상태가 마을 사람들과 통한다는 게 또한 무시무시하다. 그들은 그들에게 소문을 전해주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자신들의 바보 같은 정체를 서로 확인하며 같은 편이 된다. 이를테면 외지인이 고라니의 간을 파먹는 괴물이라고 소문을 냈던 마을 사람은, 건강식품 가게를 하는 그가 그 상황 이후 더이상 산으로 작업을 나가지 않아 텅텅 비어 있는 냉장고를 외지인이 악마임을 나타내는 증거라며 보여준다. 그게 무슨 증거냐고 타박하는 성복 옆에서 종구는 감탄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어리석은 인간의 논리와 태도는 즉각 웃음을 주지만 재난의 원인이 외부에 있는가 내부에 있는가를 신랄하게 꼬집는 이 영화의 도착점이기도 하다.

종구가 사는 마을이 속한 곡성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지만 동시에 음산하고 귀기 서린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여기 사는 사람들은 바보스러울 만큼 순박하지만 외부 사람들에게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다. 우리가 상투적으로 연상하는 시골과 시골 사람들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척하면서 이 영화는 그것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튼다. 소문으로 증폭된 의심과 종구의 확신 속에서 그들은 외지인에 대해 함께 적대적 공모의식을 갖는다. 나중에는 마을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존속살해사건들이 외지인의 사주에 따른 것이라고 단정짓고 사적 린치에 나선다. 이게 영화의 서사 전개 방향인데 다소 이상한 구석이 있다. 종구와 성복이 소문을 듣고 외지인의 산속 집을 처음 탐문했을 때 그 두 사람은 외지인의 범죄를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단서를 그의 거처에서 발견했다. 그 상황 이후에 그들은 경찰로서 마땅히 해야 할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넋이 나가버린 채로 그때부터 개인적으로 행동하며 경찰로서 그들의 역할은 플롯 상에서 아예 잊힌다. 파출소장을 비롯해 영화 초반 현장에 나타났던 형사 캐릭터들도 더이상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경찰인데도 불구하고 종구는 <추격자>의 엄중호처럼 행동한다. 외지인의 집에서 발견된 종구의 딸 효진의 신발은 종구에게 <추격자>의 엄중호처럼 아비의 보호본능을 일깨운다. 광분한 종구는 경찰로서의 공적 역할 대신 사적 복수에 나선다. 이게 무당 일광(황정민)과 귀신(으로 추정되는) 무명(천우희)이 종구를 나중에 비난하는 이유다. 종구는 수사하지 않는 대신 외지인/악마의 미끼를 물었다. 그는 나중에 친구들을 데리고 외지인을 린치해 죽이려 하고, 그때 당장은 성공하지만 악마가 되는 외지인과의 싸움에서 결국은 지독하게 패배한다. 합리적 권능의 집행자였던 경찰로서의 그는 절대적 권능을 지닌 악마와 싸우려다가 덧없이 끌려다닌다.

재앙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일종의 우화적 교훈이나 위로담으로 <곡성>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바보 같은 주인공 종구를 비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채로 자신의 딸에게 닥친 재앙을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그게 재앙을 던진 자연이나 절대적 신을 향해 우리가 갖는 보편적인 입장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무능한 그는 딸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관객으로부터 면책받는다. 무능한 경찰로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한 아버지로서 인정받는다. 인간적 관점의 테두리 내에서 절대자와 자연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귀신이나 악마와 맞선 싸움이므로 인간의 패배는 당연한 것이다. 영화 속 다른 인물에 대해 굳이 감정적 묘사를 덧입히지 않는 가운데 카메라가 유독 종구에 대해서만은, 그의 아비 본능에 대해서만은 친절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산속에서 외지인과 추격전을 벌일 때 종구는 외지인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하자 효진의 생사를 걱정하며 통곡한다. 이 사람에 대한 관객의 자연스런 감정적 연루는 아버지의 심정에 대한 동병상련과 더불어 영화가 계속 쌓아왔던 어수룩한 바보로서의 그의 캐릭터에 인간적 온기를 입힌다. 이런 감상적 정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그의 딸 효진이다. 자기 안위를 염려하는 아비에 대해, 정작 피해자인 효진은 누군가에게 빙의된 듯한 태도로 “중한 거? 중한 게 뭐인디? 중한 게 뭣인지도 모르면서…”라고 조롱한다.

무명은 종구만큼 무력하다, 안 그런가?

예수를 흉내내는 작은 악마를 주인공 캐릭터의 대립자로 내세운 나홍진의 데뷔작 <추격자>는 최소한의 서사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살인마 지영민을 잘 모르지만 얼마간 그의 심리적 내력의 맥락을 추론할 수 있었다. 그의 악마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악마성으로부터 사회 구성원을 보호하지 못하는 망가진 공적 시스템에 분노할 수 있었다. <곡성>은 아예 악마 그 자체를 내세우는데 등장인물들이 악마를 악마로 알아보지 못하거나 그들 안의 의심과 주저와 편견과 공포를 외부로 투사해 결국 그 외지인이 악마로 되어가는 걸 추동했거나 간에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이고 알 수 없는 것은 인간 공동체 바깥의 신이나 악마들이다. 이게 절대자인지 잡신인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마인지 헷갈리게끔 인간 세상의 안과 바깥의 경계에서 그들은 수시로 정체를 바꾼다. 이를테면 외지인은 고라니 간을 파먹는 괴물이었다가 시체를 좀비로 만드는 부두교적 주술의 시행자였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자신이 좀비 같은 존재인데 그런가 하면 시장에서 제물로 쓸 닭을 사려고 상인과 흥정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준다.

외지인의 존재 위험성을 계속 경고하는 무명은 성황당에서 모시는 수호신 같은 존재인 듯한데 그가 좋은 귀신인지 나쁜 귀신인지 헷갈려하는 종구에게 예수처럼 닭이 세번 울 때까지 자기 곁을 떠나지 말라고 한다. 무명은 외지인을 돕는 무당 일광을 물리칠 때 그에게 피를 토하게 할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이지만 무슨 까닭인지 어떤 때는 종구 가족을 돕다가 어떤 때는 방관하는 듯하고 외지인과의 대결에서도 크게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 같지도 않다. 무명은 종구만큼이나 무력하다. 인간의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방관자로서 존재하는 듯하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개입하려는 듯 굴고 나중에는 인간들이 겪은 재난의 현장에서 홀로 처량하게 슬퍼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일광은 더 혼란감을 주는 존재인데 그가 외지인의 사주를 받았거나 외지인과 공명하는 상태에서 마을의 굿들을 집전했다면, 아니 최소한 영화에 나온 대로 효진을 살리는 굿을 하는 척하면서 효진을 죽이는 굿을 했다면 나중에 사태를 추스를 어떤 작전이 그에게 있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악마와 귀신은 인간에 비해 훨씬 강한 힘을 갖고 있지만, 악마는 강했다가 약해졌다가 하며(나중에 악마로 정체를 드러내는 외지인은 죽을 뻔한 위기에서 홀로 슬프게 울기까지 한다) 귀신은 구경했다가 개입했다가 오락가락한다. 그 와중에 인간들은 재난 상황에 맞서려 하다가 더욱 고꾸라지며 새끼를 지키지 못하고 좌절하는 가운데 자기 가족을 죽이거나 가족이 죽는 사태를 자초하는,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맥거핀처럼 깔아놓은, 절대적 권능을 지닌 초자연적 존재들의 비일관성은 인간의 시선으론 알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서사적으로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당연히 의심하게 된다.

최악의 클라이맥스인 이유

나홍진은 불가능한 전제를 갖고 씨름했다. 악마나 귀신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심리적 연기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에서 그들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계기로 그들이 초자연적 존재가 됐는지 이야기로 성립하는 지점에 그들을 데려다놓는 것은 어렵다. 그들은 화면에 그냥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로 나타나 끝까지 알 수 없는 존재로 있다. 그들이 어떤 정체로 식별된다면 그건 그들을 보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그들을 해석하는 관객의 입장에 따른 것일 뿐이다. 우리가 귀신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서사적으로 가혹한 전제를 받아들이려면 화면에 비일관적인 단서들을 깔아놓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애매함이 애매한 채로 서사와 만나려면 화면에 보여지는 것들의 주제론적 일관성이 갖춰줘야 한다. 악마가 되는 존재가 인간이었다가 부활하고 예수의 말을 그대로 복제하는 수준이라면 이건 어떤 애매한 심오함에 가닿은 묘사가 아니라 주제넘게 마구 갖다붙인 피상적인 상징의 조합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나홍진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신이 없다는 진실을 외치고 싶었다면 그것도 좋다. 신이 역사하는 현실 못지않게 악마가 좌지우지하는 부조리를 묘사하고 싶었다고 해도 좋다. 아니면 예수의 부활과 그에 따른 인간의 죄의식을 자양분으로 하는 기독교의 교리에 침을 뱉고 싶었다고 해도 좋다. 그에 따른 자명한 결과는 인간들이 재앙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원인도 모른다는 것인데,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이것을 우리의 부조리한 현실이라고 뭉뚱그려 메타포나 상징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영화언어의 본질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본다. 서사적 장치를 통해 명시적으로 말해지지 않는다고 해도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통해 주제의 고유성과 깊이는 성립할 수 있다. 대개 위대한 영화가 그렇다. <곡성>은 애매모호함과 복합성과 중의성이라는 장치를 편의적으로 배치해놓고 그것이 서사에서 특정한 오해를 야기하게끔 하는 동력으로 전개를 이어가는 영화다. 툭툭 끊어지며 일정한 오해에서 빚어진 충격을 통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굿 장면 이후의 후반부는 허다한 반칙으로 점철된 최악의 클라이맥스다. 그것이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이원적 구성의 영화적 세계이고, 인간이 알 수 없는 불가해한 부조리의 세계를 탐구하는 풍부한 예술적 방법론이라고 한다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이런 식의 맥거핀을 위장한 속임수가 나홍진의 특출한 상상력의 본령이라고는 생각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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