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까지만 해도 살인사건 현장검증에 가보면 군중 사이에서 어김없이 고함이 터져나오곤 했다. “저놈 저거 마스크 벗겨!” “씨◯ 얼굴은 왜 가려줘? 벗겨!” 기어이 얼굴을 봐야겠다며 폴리스라인을 넘어 피의자에게 달려드는 사람도 있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경찰서로 끌려들어가는 흉악범의 모습이 TV에 나오면 방송사엔 항의전화가 잇따른다. “광화문 광장에 매달아 쳐죽일 놈”의 신변을 무슨 이유로 보호해주냐는 거다. 요즘은 이런 목소리가 드물다. 경찰이 알아서 얼굴을 공개하기 때문이다. 경기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을 저지른 강호순 검거 이후 특정강력범죄의처벌에관한특례법이 개정(2010)되면서부터다. 공개 여부를 경찰 위원회에서 정하는데 위원장은 용의자 검거로 기세등등해진 경찰서장이다. ‘살인자의 부모’, ‘살인자의 자녀’, ‘살인자의 애인’ 등 무고한 사람들은 지인들 사이에서 사회적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방송사 보도국 내부에서도 흉악범의 얼굴을 내보낼 것인지 종종 논란이 있어왔지만 최근 들어 토론은 사라진 분위기다. 지난 어린이날 대부도 토막살인 피의자 조성호를 붙잡은 경찰은, 검거 1시간 만에 얼굴 공개를 결정했다.
공동체에 의해 행해지는 공중처벌
강호순이나 조성호의 죄를 두둔할 생각은 없음을 전제하고 사법 시스템에 의한 ‘공적 처벌’과 별개로 공동체에 의해 행해지는 처벌을 ‘공중(公衆)처벌’이라 부르기로 하자. 공중처벌의 역사는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고 봐도 될 것이다. 사회계약에 의한 리바이어던이 사법권을 점유하기 이전에는 사적(私的) 복수를 용인하는 것을 포함한 공중처벌이 공동체 유지 기능을 해왔다. 그 잔혹성은 침팬지 사회의 그것과 차이가 없을 만큼 격했다. 중세시대에 교회와 영주가 사법권을 가지면서 공적 처벌은 공중처벌과 병행됐다. 고문도구를 활용한 그 잔혹성은 침팬지 사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처형에 고문을 동원한 이유는 공중처벌을 아우르기 위함이었다. “당시 처벌은 대중의 오락이었고 참여 스포츠였다. 집행자가 죄수의 몸에 ‘서양배’라는 이름의 기구를 쑤셔넣은 다음 천천히 스크루를 돌려 몸을 안쪽으로부터 찢는 동안, 구경꾼들은 그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광경을 보며 환성을 올렸다.”(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요약)
마녀재판으로 상징되는 이같은 처벌이 중세만의 것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근대로 이행한 시기에 오히려 정점을 이뤘다. 중부 유럽의 쾰른, 마인츠, 트리어 등지에서 16세기 말 처형된 사람의 숫자는 약 2천명에 이른다. 뷔르츠부르크 주교구에선 1623~31년에만 900명을 처형했다. 그러니까 갈릴레이와 뉴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시대에 이랬다는 얘기다. “마녀재판이 성공하려면 주민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누군가 이웃을 마녀로 고발하고 여기에 필요한 증언을 해야 한다. 희생자들을 마녀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결국 이웃이었다. 마녀재판은 결과적으로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주경철의 <마녀>에서 발췌)
변화무쌍한 집단 시뮬라크르
북유럽영화 <히어 애프터>는 진보된 문명사회에서 행해지는 공중처벌을 관찰한다. 17살 욘(율리크 먼더)은 2년간의 소년원 복역을 마치고 퇴소했다. 학교 교사들이나 또래 친구들의 태도로 미뤄볼 때 그의 범죄는 끔찍했다. 교사들은 욘에게 학교를 다닐 권리가 있음을 알고 학생들에게 이를 강조하지만 스스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욘과 친구가 돼주는 사람은 그의 범죄 이후 전학 온 여학생 마린(로아 에크)뿐이다. 욘은 “혼자 있기 싫어서” 급우들의 따돌림과 폭력을 묵묵히 감내한다.
영화의 원제 ‘Efterskalv’는 여진(餘震)이라는 뜻이다. 소년원에서 짐을 싸는 장면에서 출발한 카메라는 진앙을 뒤로 한 채 소년의 죄와 벌이 법적으로 완료된 이후를 좇는다. 시스템에 의해 죗값을 모두 치른 그는 무엇을 어디까지 더 감당해야 할까. 관객은 상영시간 절반이 지나도록 2년 전 소년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죄가 포용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지 판단하고 싶다. 살얼음판에 선 심정으로 주변 인물들의 차가운 눈초리를 지켜봐야 한다. 즉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소스라치게 놀랐을 마을 주민들과 그날 이후 이곳에 당도한 관객의 인식에는 차이가 생긴다. 이 점에서 전학생 마린과 관객은 같은 그룹 소속이다. 욘의 가족을 제외한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을 하나의 다른 그룹으로 묶자면, 두 그룹이 소년에 대해 상이한 시뮬라크르를 그린다는 게 이 영화의 핵심이다. 목격하지 않은 하나의 사안에 대한 다른 시뮬라크르. 중세 마녀재판 때나 현대 북유럽이나, 공중처벌에 가담한 사람들은 해당 범죄를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다. 흉악범의 얼굴을 봐야겠다며 경찰 저지선을 뛰어넘는 남자, 마녀의 화형에 동참하는 군중, 최근 북유럽 지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극우단체, 욘의 집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또래의 머릿속에 어떤 시뮬라크르가 생성됐는지를 살피자는 게 이 영화의 인류학적 제안이다.
가정해보자. 한 사람을 살해한 용의자를 체포한 다음 희생자 시신을 찾아보니 토막 상태로 유기된 사실이 확인된 경우와, 토막시신이 방조제에서 발견돼 흉흉한 소식이 확산된 뒤 적지 않은 수사 기간 끝에 용의자를 검거한 경우의 차이를. 범죄 사실도 같고 법원의 양형 또한 다름없겠지만 공중처벌의 수위는 달라진다. 전자의 경우 피의자 얼굴 공개가 일사천리로 이뤄지지도 않거니와 언론에서도 하루 이상 후속 보도를 내기 어려울 것이다. 후자의 경우 시신 발견부터 용의자 검거에 이르는 며칠 사이 대중과 경찰서장의 뇌에는 어떤 상(像)이 맺힐까. <히어 애프터>는 영화의 출발점과 이후 카메라의 행적,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지역 공동체, 어머니라곤 등장하지 않는 각각의 가정, 처벌을 가하는 이들과 관객에게 주어진 정보 차이 등을 통해 폭력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이를 통해 확인되는 바는 하나의 사태로부터 파생되는 변화무쌍한 집단 시뮬라크르다. 따라서 욘의 범죄 현장을 스크린에 보여주지 않는 것은 이 영화의 핵심적 형식 기준이다. 관객의 뇌에 새겨지는 표상 또는 재현(representation)은 입력되는 정보의 내용은 물론 시간적 차이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진다. 들뢰즈는 “진리를 생산하는 것은 거짓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이라고 했다. 그러고보면 인간 사회는 역동적인 위조(falsification)에 의해 유지•운영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함께 언급되곤 하는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더 헌트>(2012)가 누구 하나 악하지 않은 인물들이 만들어낸 악한 결과를 살폈다면, 이 영화는 누구나 갖고 있는 악이 만나 만들어내는 유동적인 표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관객은 스스로 다그치게 된다. 나 또는 나의 자녀가 욘과 같은 학교를 다닌다면 그의 전학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할 것인가. 내가 혐오하는 대상의 표상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인가. 질문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최소 7명의 여성을 납치•살해한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하기까지 논란과 토론과 시간을 투여하는 사회와 동거남 1명을 살해한 조성호의 얼굴을 단 1시간 만에 공개하는 사회 중 우리는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