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전의 이야기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류 문명에 기여한 단 한 가지를 꼽으라면 (‘할리우드!’라고 <씨네21> 독자들은 생각하겠지만…) ‘표현의 자유’를 상식과 제도로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이게 얼마나 위대한 일이냐면, ‘생각하고 느낀 대로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상식을 제도로 보장하는 일이 (21세기를 16년이나 보낸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요원하다. 이 분야에 관한 한 대부분의 국가는 여전히 미개한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제일은 미국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전투였고, 무엇보다 공격이었다. 평등이 방어적 권리라면 자유는 공격적 권리다. 자유는 자유의 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그런 결기로 뭉친 이들이 미국 수정헌법 1조에서 저 유명한 ‘표현의 자유’를 선포했고, 그 뒤에 붙은 2조에선 ‘총기 소지의 자유’를 박아두었는데, 내가 파악한 그 논리 구조는 이러하다. “표현의 자유를 모두에게 보장하려고 이 나라를 만든다.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이를 침해할 수 없다. 안 그러면 총을 들고 싸워 그 정부를 무너뜨릴 것이다. 표현의 자유 앞에 함부로 개기지 말라.”
그 정신을 지키겠다고 전투를 펼쳐온 것은 기자들이었다. 벤저민 프랭클린, 제임스 매디슨 등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스스로 신문을 발행하거나 여러 신문에 활발하게 기고한 언론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치인’이 아니라 ‘언론인’으로 생각했던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를 택하느니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까지 말했던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곳은 보스턴이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건립된 도시인 이곳에서 독립혁명의 불씨를 댕긴 보스턴 티파티 사건 등이 일어났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주로 활동했던 곳도 보스턴이다. 그리고 1872년 창간한 <보스턴 글로브>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언론이다.
그들의 무기는 탐사보도였다. 오늘날 미국 탐사보도 기자들은 스스로를 ‘머크레이커’(muckraker)의 후예라고 부르는데, 머크레이커는 페니페이퍼 시절 권력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갈퀴로 긁어내듯 추적했던 이들의 별칭이다. 여기에는 기자들을 성가시게 여기는 권력자들의 비아냥이 포함돼 있지만, 오늘날 머크레이커들은 좀더 멋있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였다. 탐사보도 기자(investigative reporter)다.
다만 그 한국어 번역에 잘못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어 ‘investigative’는 ‘수사’의 뜻이 강하다. 권력자가 하는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겠다는 것, 권력에 기대지 않고 기자 스스로 수사하듯 취재하여 보도하겠다는 게 ‘수사보도’의 정신이다. 수사보도라 불러야 마땅한 탐사보도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고발하는 언론의 무기다.
그리고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보스턴 글로브> 탐사보도팀 ‘스포트라이트’가 그 무기를 어찌 휘두르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혹독하고 날카롭고 감미로운 정의 구현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는 꿈같은 이야기다.
영화 속 이야기
‘텐 서티’(10시30분)라 불리는 편집회의에 후줄근한 셔츠를 입은 이들이 모여 앉아 심각하게 연필을 빠는 모습 등은 한국의 뉴스룸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취재하면서 만국의 기자들을 일일이 직접 관찰한 바에 따르면, 기자란 족속은 정말이지 국적•인종에 상관없이 추레하며, 추레한 것을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즐거움과 가치는 ‘닮은 그림 찾기’가 아니라, 한국 언론계에는 없고 미국 언론계에만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데 있다. 첫째, 그들은 완전성(wholeness)을 추구한다. 기자가 취재의 일말을 보고하자 편집국장이 말한다. “신부 말고 교회!” 기자가 보도를 채근하자 탐사보도팀장이 말한다. “한놈이 아니라 체계를 고발해야지!” 개인이 아니라 체계, 일탈이 아니라 구조, 단발이 아니라 추적 등에 대한 고심이 이 영화, 그리고 탐사보도의 거의 전부다.
흔히 보도의 규준으로 통용되는 객관성(objectivity)은 개인의 관념에 영향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자체의 본성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비롯한 ‘객관적’(objective)이란 말은 사물 또는 세계의 본성에 최대한 다가가려는 태도 또는 그러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정도를 뜻한다. 그 기사는 객관적인가, 라는 질문은 사안의 본질과 총체를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에서 객관성은 이런저런 의견을 나열하는 ‘기계적 객관주의’로 변질됐다. 현대 미국 언론은 (복잡하고 혼란스런) 객관성 규준 대신 완전성을 강조한다. 그 기사는 완전한가, 라는 질문이 갖는 엄정함은 객관성에 대한 질문보다 더 강력하다. 그리고 그들의 꿈은 ‘완전한 기사’다.
둘째, 그들은 자명하게 주어진 것을 고발한다. 뉴스 수준을 측정하려면 누구를 고발하는지 보면 된다. 어떤 일에 대해 뉴스가 되는지 안 되는지 판단하는 기준을 ‘뉴스 가치’라고 하는데, 수준이 낮은 기자 또는 언론일수록 ‘일탈성’을 최고의 뉴스 가치로 친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게 아니라 사람이 개를 물어야 기사가 된다는 우스개는 그런 일탈성 기준에 대한 것이다.
일탈은 항상 ‘정상성’을 전제로 한다. 대부분의 언론은 그런 정상적이고 자명한 것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모든 사회마다 정상성의 영역이 있다. 예컨대 민족주의, 국가주의, 남성중심주의, 자본주의 등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좋은 언론은 지배적이어서 자명하며 그래서 정상적인 것으로 통용되는 것에 의문을 던지고 파헤치고 마침내 뒤엎는다. 고급 식당에서 값비싼 음식을 공짜로 먹은 ‘일탈적 공무원’을 고발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그 권력의 크기가 자명하며 그 지배가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대통령을 고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한국의 대부분 언론은 어려운 일은 피하고 쉬운 일에 매달린다. 술 취한 동네 건달을 고발하고, 권력에 취한 최고통치자에 눈감는다. 반면 영화 속 기자들은 보스턴 또는 미국이라는 사회에 깔려 있던 정상성의 토대와 정면으로 맞선다. 그 일에 두려움이 없다.
셋째, 그들은 유능한 편집국장과 함께 일한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인데) 경영난을 겪던 <보스턴 글로브>는 1993년 <뉴욕타임스>를 발행하는 뉴욕타임스컴퍼니에 인수됐다. 그 와중에 이 영화의 등장인물인 마티 배런이 새 편집국장으로 부임한다.
(역시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인데) <보스턴 글로브>는 전통적으로 국제 뉴스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신임 국장은 (아마도 시장적 판단을 겸하여) ‘지역 독자에게 어필할 지역 뉴스’를 주문한다. 그것이 말랑말랑한 오락성 콘텐츠였다면 이 영화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 국장은 보스턴을 대표하는 종교인 가톨릭의 추문을 파헤칠 것을 탐사팀에 주문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취재의 출발은 진실 추구라는 추상적 목표에 기초한 순진무구한 이들의 정의로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으려는 어느 신문사의 욕망이고, 그 신문사를 되살리려는 편집국장의 야심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욕망은 죄악이 아니며, 오히려 에너지다. 로컬 뉴스에 주목하겠다거나, 보스턴 사람들의 상식을 정면으로 뒤엎는 선정성을 의도했다거나, 이를 통해 자신의 영달을 도모해보겠다거나 하는 욕망이 매체를 바꾼다. 기자로서의 야심과 욕망을 에너지로 전환시켜 언론의 위상을 상승시킬 누군가가 한국에도 절실하다.
그리고 넷째, 이 모든 과정에서 그들은 인내한다. 이 보도를 준비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경쟁 매체가 낌새를 챘다는 점을 알았더라도 보도를 미룬다. 한명의 신부를 고발하기에 충분한 취재를 마쳤더라도 더 많은 신부를 추적하기 위해 보도를 미룬다. 수많은 신부들의 추문을 파헤쳤더라도 그들을 온존케 한 체계와 관행의 책임자를 뿌리 뽑기 위해 보도를 미룬다. 사실의 총체로서의 온전한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그들은 인내한다.
영화 이후의 이야기
(이제부터는 영화에 일체 나오지 않는 이야기인데) 진짜 드라마는 영화가 끝난 다음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희극도 비극도 아닌, 연옥의 어딘가에서 비롯했을 잿빛을 띠고 있다.
<보스턴 글로브>는 이 기사를 2002년 1월부터 12월까지 19차례에 걸쳐 연속 보도했다. 말 그대로 1년 내내 물고 늘어졌다. 2003년 퓰리처상 공공보도 부문(public service)에서 수상했다. 퓰리처상 심사위원회가 선정하는 언론분야 14개상 가운데 대상에 해당한다.
그 기사가 가톨릭교회의 도덕적 위기를 바로잡는 데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언론의 경영적 위기를 되돌리는 데는 크게 기여하지 못한 듯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보스턴 글로브>의 경영진은 기자들을 감원하거나 연봉을 삭감했고, 기자조합은 이에 반대했으며, 급기야 폐간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다 보스턴을 연고지로 둔 세계적 거부인 존 헨리가 이 신문사를 인수했다. <보스턴 글로브>를 11억달러에 사들였던 뉴욕타임스사는 매각 대금으로 7천만달러를 받았다. 헐값에 팔아치운 것이다. 야구팀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이기도 한 새 소유주가 사회적 기부 차원에서 이 신문사를 떠안았는지 어땠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 이후로도 <보스턴 글로브>가 대단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지는 못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스포트라이트’ 소속 기자들은 아직 <보스턴 글로브>에서 일하고 있지만, 배런 편집국장은 자리를 옮겼다. 2013년부터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을 맡았다. 현대적 탐사보도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워터게이트’ 보도로 유명한 이 신문사 역시 경영난을 겪다가 정보통신(IT) 기업인 아마존에 인수됐다.
전통 언론의 위기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디지털 세계가 도래하여 발생한 일이다. 좋은 기사를 돈 내고 보는 사람들이 사라져버렸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기사에 돈을 내려는 사람이 줄어든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우리, 좋은 기사를 보도한 적이 있던가?
영화 속 <보스턴 글로브> 기자들은 그렇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 그들의 연봉을 삭감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그들을 대체할 정의로운 기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력을 감축하는 것도 옳지 않아 보인다. 그들이 1년씩 탐사 취재할 수 없다면 이런 기사들이 더 태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독자들은 그들이 위기에 처할 때, 마치 기자들이 그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것처럼, 다시 손을 내밀고 돈을 모으고 힘을 보탤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진짜 질문은 따로 있다. 우리, 한국의 기자들도 그러한가. 우리도 완전성을 추구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볼 만한 일을 해왔는가. 앞으로 도모할 생각이 있는가. 안 그렇다면, 망해가는 언론에 대해 누구를 타박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