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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장률의 마음이 선 자리

<풍경>에서 느낀 당혹감에 대한 질문들

<풍경>은 장률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다. 다섯 번째 극장편인 <두만강>과 <풍경> 사이, 그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평론가 정성일과의 지난 인터뷰(<씨네21> 933호 “안개 속의 풍경”)에서 그가 말했듯,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거주지를 서울로 옮긴 것이다. 그의 지난 영화들을 돌아볼 때, 장률에게 장소의 이동, 변화는 거의 모든 것의 변화다. 그것은 삶의 조건과 태도뿐만 아니라, 영화의 형식과 리듬의 필연적인 변화를 예견한다.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산다는 것. 사건의 공간이 아닌 일상의 공간. 그 차이가 <풍경>에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풍경>은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다큐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장률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는 첫 영화가 될 터였다.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종종 예상치 못한 당혹감과 마주해야 했다. 장률의 지난 극영화들이 최대한 피해왔던 것들을 <풍경>은 적극적으로 끌어안거나 내버려두고 있었다. 견고하고 치열하게 자신의 영화세계를 지켜온 감독의 예술관이 고작 몇년 사이에 변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건 비평의 게으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장률이 아직은 장르적으로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 다큐멘터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긴 현상일까. 이 영화를 두 번째 볼 때에야 나는 내게 당혹감을 준 요소들이 장르적 미숙함이나 변화와 같은 용어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 당혹감의 정체는 <풍경>이 넘어서야 할 결함이 아니라, <풍경>에서 읽혀야 할 질문들이었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 질문은 결국 감독 장률의 자리에 대한 질문과 연결된다. <풍경>을 이루고 있는 그 질문들의 결을 들여다보는 글이 쓰고 싶어졌다.

카메라와 피사체의 의식적인 거리

알려진 대로 <풍경>은 이주민 노동자 열네명의 노동현장을 지켜보고, 그들을 인터뷰한다. 인터뷰의 질문은 ‘당신이 한국에 와서 꾼 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은 무엇입니까?’이며, 이들이 답하는 모습을 찍을 때 카메라는 한자리에 서서 노동자들을 지켜본다. 이들의 황폐한 현실로부터 가장 자유롭고 가장 사적인 이야기를 듣는 순간인데,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를 품고 쳐다보는 영화의 공기와 시선은 인터뷰 장면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경직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 인상은 이들이 기억해낸 꿈의 내용적 차원에 근거한다기보다는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의식적인 거리감과 관련이 있다. 나는 <풍경>의 카메라가 노동자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이들과 육체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내밀한 관계가 되기를 스스로 차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카메라가 원하지 않아서 거부하고 있다는 느낌과는 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장률은 인터뷰에서 “사람들 사이의 모든 거리는 계산이에요. 나는 실제 거리를 찾았어요. 그런 거리 속에서 나와 저 사람의 감정이 흐를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거리. 거기서 더 들어가면 용기인데 나에게 그런 건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혹은 그는 사진관 장면의 흥미로운 소녀에 대한 호기심에 대해 말할 때도, “거기서 멈춰야 했어요”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이 말들, 아니, 선택은 놀랍지 않다. 우리는 그의 지난 극영화들을 통해, 그가 멈춰야 하는 순간을 결단하는 데 매우 예민한 창작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 가서는 안 될 순간 앞에서 멈추는 행위, 카메라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시점을 판단하는 일은 그에게 영화적인 윤리였다. 그러니 <풍경>의 인터뷰 장면들과 노동현장의 장면들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은 이전 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장률의 윤리적인 결단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인가? 그의 대답으로만 보자면,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이 장면들에서 느껴지는 심리적인 동시에 물리적인 거리감은 이 영화의 윤리이기는 한데, 그것이 결단보다는 어딘지 좌절과 체념, 두려움에 좀더 가깝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에 대해서라면 나는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갖고 있다. 하나는 그런 거리감이 노동자들과 카메라의 상호작용이 빚어낼 수 있는, 즉 질문과 답을 넘어서는 의외의 파열과 돌출을 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혹은 꿈을 발화한다는 행위 자체에서 툭 터져나올 법한 어떤 자유로움을 가두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풍경>이 지켜내려는 이 거리의 엄중함이 곧 노동자들의 삶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라는 데 동의한다. 장률이 수많은 노동자들의 이야기 조각들을 한 덩어리로 뭉치지 않으면서도 끝내 이 풍경의 리듬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태도 덕분이라는 생각도 한다.

냉정한 촬영, 감정을 드러낸 편집

정작 나를 의아하게 만든 건 노동자들의 장면 사이사이에 삽입된 풍경 장면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자들이 꿈을 말하는 장면들과 이어 등장하는 풍경 장면들의 관계에는 장률의 극영화들을 떠올릴 때 확실히 낯선 구석이 있다. 노동자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만 있던 영화는 다음 장면에서 자신이 들었던 그 꿈의 장소로 가서 그 풍경을 찍는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와리우라 브후아이야가 꿈에서 아내와 실제로는 한번도 가본 적 없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제주도에 간 기억을 들려주자, 영화는 다음 장면에서 실제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제주도의 풍광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세크할 마문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꿈을 다섯번이나 꿨다고 말하자, 영화는 다음 장면에서 나뭇잎을 뜯어먹는 코끼리를 보여준다. 그 코끼리가 프레임을 나간 뒤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세크할 마문이 현재 일하는 모습을 유리창 건너편에서 지켜본다. 그 유리창에는 코끼리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혹은 캄보디아에서 온 초웁 칸피아룬이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뒤로 돌아가려고 하니 강물이 들어서 있고, 앞을 보니 길은 없어지고 강물뿐이었던 꿈을 떠올리자,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텅 빈 마당에 작은 자전거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자전거는 마치 귀신이 타고 있는 것처럼 저절로 움직인다. 타이에서 온 브라욘 쁘쿤은 자신이 화상을 입기 전 꾼 꿈을 말한다. 불을 본 꿈이었는데, 영화는 다음 장면에서 잔잔하고 투명한 물가에 한참 동안 시선을 둔다.

고통과 쓸쓸함을 무색무취한 언어로 감추는 노동자들의 경직된 장면들과 비교할 때, 뒤에 이어지는 자연과 동물의 풍경에는 확실히 해방감이 있다. 인간의 그림자 없이 그 자연과 동물들이 존재하는 시간의 리듬은 신비롭고 존엄하며 자유롭고 마술적이다. 장률과 정성일이 나눈 대화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장면 연결이 노동자들의 꿈을 영화적으로 이뤄주고 위로해주고 싶은 <풍경>의 소망임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 헤아림이 존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영화의 흐름으로 볼 때, 여기에는 좀 이상한 불균형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꿈을 말하는 인터뷰 대상자들)으로는 최대한 건조한 시선을 취하며 더 들어가길 멈추고, 다른 한편(꿈의 풍경들)으로는 감정을 끌어안는 데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현실 앞에서는 거리를 유지하지만, 영화로 그들의 꿈에 개입하는 것에는 그만큼의 망설임이 없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풍경>은 개별 장면들은 냉정하게 찍었지만, 편집에서는 감정을 제어하지 않고 그 감정의 드러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간극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풍경>은 둘 사이의 그 간극을 의도적으로 벌려놓고 있거나, 그 간극을 좁히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나는 그 간극에서 그간 장률이 가장 중시했던 무언가가 부족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영화 속의 현실과 꿈의 관계에서, 노동자들의 꿈의 기억과 영화가 형상화하는 꿈의 풍경 사이에 부족한 것은 이물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풍경인 마장동 도축장 장면 다음에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인 옷감공장의 장면을 붙인 이유에 대해 장률은 “마장동 도축 장면을 정화할 그런 꿈이 필요했는데 여기서 많이 해소한 거지요”(933호)라고 설명했고, 나는 그 대답이 놀라웠다. 그의 지난 영화들에서 그가 지켜내고자 했던 건 끝내 무엇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잉여의 상태가 아니었던가? <풍경>의 카메라가 피사체에 엄격한 거리를 두고 어느 이상 다가가지 않으면서 편집을 통해 꿈의 풍경으로 도약, 혹은 비약할 때, 이 이행의 형식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때때로 지나치게 명징하고 확정적인 것 같다. 혹은 그 이행은 종종 감정적으로 성급하다. 무엇이 이물감 대신 해소를, 대상을 뚫고 들어가는 대신 풍경으로의 이동을 하게 만들었을까? 그건 <풍경>이 결국 한국에 대한 장률의 ‘인상’의 기록이기 때문이라고 말해버리는 걸로 충분할까? 장률은 지금 어느 자리에서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다큐로서 빛나는 순간들

이에 답하기 전에, 먼저 다큐멘터리로서 이 영화의 빛나는 순간들에 대해 말하는 게 좋겠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와리우라는 꿈에서 아내와 제주도에 갔던 기억을 꺼낸다. 그는 서툰 한국어로 그 기억을 더듬는데, 그 순간 그에게 나오는 생기는 모국어로 꿈을 말하는 이들에게서는 보지 못한 느낌이다. 그들은 막힘없이 매끄럽게 꿈에 대해 말하지만 어딘지 무심하고 딱딱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와리우라가 타국의 언어로 한번도 가보지 못한 타국의 섬에 대한 기억을 더듬더듬 말할 때, 그를 감도는 꿈의 감흥은 다르다. 그의 들뜬 표정과 제스처와 거기 담긴 간절함은 이후 영화가 보여주는 제주도의 실제 풍경보다도 풍요롭고 생생하다. 언어의 서사를 넘어서는 이 인터뷰 장면은 열네명의 인터뷰 중에서 가장 꿈의 활기에 닿아 있는 것 같다. 이와 정반대의 지점에 있지만, 그만큼의 울림을 주는 장면은 중국에서 온 쉬첸밍의 사연이 나올 때다. 소와 돼지가 갈기갈기 찢기고 토막나는 마장동 도축장의 풍경 안에서 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돼지 내장을 손질하는 일과 추방당하는 일이다. 그는 꿈에서도 그 두 가지 일만 벌어진다고 말한다. 이 잔혹한 풍경과 무기력한 목소리에는 다른 노동자들의 인터뷰에 배어나는 향수나 소망, 일말의 낭만 같은 것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그에게 꿈은 현실의 출구가 아니라 현실의 무한한 반복일 뿐이다. 장률은 이 남자에게만큼은 꿈의 풍경으로 섣부르게 영화적 위로를 건네지 못한다. 다음 장면에서 그저 좀더 나은 꿈을 꾸는 노동자에게로 옮겨가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의 사연과 피비린내나는 축산시장의 이미지는 영화 속 꿈의 풍경들 위를 유령처럼 부유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우연의 활력으로 가득한 장면은 연변에서 온 소녀 송홍련이 불쑥 등장해서 사진관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다. 아마도 이 사진관에서의 대화는 <풍경>에서 유일하게 준비되지 않은 질문과 준비되지 않은 대답일 것이다. 그 즉흥성과 우연이 빚어내는 엉뚱함과 재치, 친밀감과 어색함은 <풍경>이 포착한 가장 훌륭한 리듬이다. 카메라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거나 특별히 개입한다는 인상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인데, 그 앞에서 삶의 구체적인 순간이 스스로 충만하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이 소녀와 사진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영화 속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알게 된다. 물론 소녀는 천진함을 잃은 어른이 아니고, 피폐한 노동자가 아니며, 미리 섭외한 인물이 아니라는 우연이 이 순간의 활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다시 물을 수도 있다. 왜 프레임 밖의 감독이 못한 것을 프레임 안의 사진사는 할 수 있었을까? 왜 노동자들에게 불가능했던 순간이 소녀에게는 가능했을까?

나는 <풍경>이 이런 질문을 의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의도와 무관하게 그 질문이 이 장면에 기입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사진관 장면의 또 다른 인상적인 순간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외국인 남자가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앉아 있다. 영화의 프레임 밖에서 사진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지금 무뚝뚝하게 앉아 있는 손님을 향해 ‘김치, 치즈, 스마일’ 등의 단어를 동원해 미소를 짓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남자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다. 다음 장면에서 사진사는 결국 컴퓨터로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을 매만져 좀더 상냥하고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변형하고 있다. 사진관에서 흔히 하는 작업이기는 하지만, 마치 영화는 이 순간을 찍으며 다큐멘터리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는 것만 같다. 프레임 밖의 나, 카메라를 든 나, 그들의 세계를 관찰하고 기록하려는 나의 질문과 의도와 시선은 과연 그들에게 얼마나 닿을 수 있을 것인가. 그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세계의 호흡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 피사체와의 심정적, 물리적 거리를 지켜온 <풍경>이 한편의 다큐멘터리로서 자신의 실패를 바라보는 시선 혹은 쓰라린 심정이 여기 있는 것 같다.

창작자와 이방인 사이에서 흔들리는 영화

이제 다시 위의 질문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노동자들의 꿈에 대한 인터뷰와 꿈의 풍경들 사이에 기입된 간극과 그간의 장률의 세계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적인 편집은 결국 이 영화를 찍는 장률의 위치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인터뷰를 통해 그는 “나와 사는 방식이 다른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자꾸 눈길이 가서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말이 중요한 것 같다. ‘나와 삶의 조건이 다르지만 이방인이라는 같은 처지’라는 말일 것이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를 찍는 내국인 감독이 아니다. 혹은 이주민 노동자를 찍는 이주민 노동자가 아니다. 그 스스로도 고향을 떠나온 자이며 정서상으로는 이주민 노동자들에게 가까울지라도 그가 현재 주변부의 빈곤한 노동자가 아니라, 감독이고 대학교수라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차이다. 말하자면 “다른”과 “같은” 사이에 그는 존재한다. 나는 <풍경>이 그 둘을 화해시키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되었으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의 반문으로 끝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장률은 자신이 찍은 서울의 풍경과 꿈의 풍경으로 이주민들의 고단한 고백과 꿈과 일상에 화답하고 싶어 한다. 이 영화가 이방인들의 풍경이라는 것만큼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그에 대한 장률의 화답이라는 점이다. 그는 그렇게 그들과의 다름보다는 같음으로 소통의 지점을 찾으며 이 다큐멘터리에서, 나아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자신의 자리를 묻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게 이 영화의 무의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들의 꿈에 화답할수록, 그 꿈의 허망함과 현실의 피폐함에 아련한 꿈의 풍경으로 화답하고 위로할수록, 영화는 그들의 현실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을 맴돌 뿐이다. 영화 속 안개가 자욱하게 낀 풍경이 슬프다면, 그 사실을 자각하는 이 영화의 마음의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그 표면을 뚫고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분주한 도시의 대로를 지나 어두운 터널과 좁은 골목길을 쉬지 않고 저돌적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갑자기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며 하늘을 바라본다. 분노든, 다짐이든, 절박함이든, 무언가 노골적인 감정의 분출이 여기 있다. 이 장면의 공격적인 속도는 앞서 영화가 유지하던 거리감이나 정적이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의도적으로 훼손해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온 길의 끝에는 누구도 없다. <풍경>은 그 많은 이방인들의 꿈을 지나 결국 혼자 남는다. 혼자 남은 이 시선의 주인은 누구일까. 나는 이 마지막의 의미를 희망이나 절망이라는 언어로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이 있다. 장률은 끝내 이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다. <풍경>은 그 사실에 대한 궁극의 인정이다. <풍경>은 고향에 대한 아련함과 이방인으로서의 고독을 위로와 동질감으로 품고 싶었으나, 결국 홀로 남아 불확신과 분열과 실패의 흔적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꿈이다. 이 영화가 장률의 최고작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풍경>은 냉정한 창작자의 시선 이전에 한 사람의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이 더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숨겨지지 않고 정리되지 않으며 잘라낼 수 없는 이 감정, 그리고 타인의 꿈이라는 불확정적인 세계에 성급하게 화답하고자 하는 욕망이 <풍경>의 영화적 활기를 때때로 멈춰 세우는 것도 사실이다. 한명의 창작자로서의 냉정한 시선과 한명의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적 동요 사이에서 이 영화는 흔들린다. 하지만 그런 이유에서 <풍경>은 어쩌면 장률이 자신의 현재를 바라보는 심정이 그대로 투영된 영화다. 그 심정은 정직하다. 그리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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