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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슬로모션, 넌 누구냐?

무관해 보이지만 무관하지 않은 두 영화, 두 장면에 관하여

영화 촬영현장이었습니다. 자동차 세대가 굉음을 내며 차례로 터널을 뚫고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두대의 대형 자동차 중간에 끼어 달리는 소형 자동차에는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스크린에 펼쳐질 때 우리는 가운데에 있는 저 소형차와 카메라 덕분에 두대의 대형 자동차가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감독은 여러 번 그 장면을 되풀이하며 고심을 거듭했는데 그때 그의 고민의 내용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습니다. 쾌속의 운동감을 어떻게 더 상승시킬 것인가. 그게 그의 고민이었을 겁니다. 한 귀퉁이에 서서 그걸 지켜보다가 지금의 문제를 문득 떠올립니다. 저의 호기심은 그 감독의 고민과 정확히 반대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가 빠르기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저는 느려서 이상한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실상은 긴요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어느 두편의 영화의 두개의 장면,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문제에 관한 호기심이 문득 그때 다시 생겨난 것입니다.

<킬링 소프틀리>를 보고 <은교>를 떠올리다

촉망받는 신예 감독 앤드루 도미닉의 <킬링 소프틀리>는 오바마 시대의 미국 금융 위기를 빗댄, 뛰어난 정치풍자극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의 풍자성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감독 스스로 동시대의 풍자극이라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건 너무 도식적이랄까요. 저로서는 다른 것이 이 영화의 매력입니다. 얼치기 무뢰배들의 엉성하기 짝이 없어서 더 긴장감이 솟구치는 범죄 행각, 그런 짓을 저지르는 앞과 뒤에도 그칠 줄 모르고 지껄이는 쓸데없이 긴 잡담, 구렁이처럼 슬그머니 나타나 모든 사건을 종결지어버리는 살인 청부업자의 몸에 밴 느긋함, 어느 쪽으로 보아도 전부 구식들이 판을 치는 것 같은 인상, 혹은 그 구식들에 어울리는 한심하고 게으를 정도로 느껴지는 영화의 느린 리듬. 저는 이 영화의 그런 느릿느릿한 면모에 호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느림을 대단히 과시하는 것 같은 장면 하나가 영화 속에 등장합니다.

살인 청부업자 잭키 코건(브래드 피트)이 마키(레이 리오타)를 살해하는 장면입니다. 마키는 도박판 관리인입니다. 그는 자작극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관리하는 도박판을 누군가에게 일부러 털게 하고 그 돈을 나눠 가진 것입니다. 그때는 그럭저럭 넘어간 일이 되었습니다만, 이번에 마키의 도박판이 또 털리자 마피아의 우두머리들은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합니다. 이번에는 마키의 짓이 아니라는 게 곧 밝혀지지만 그렇다 해도 그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됩니다. 잭키는 마키의 차 옆에 차를 세웁니다. 이내 잭키가 쏜 총알은 마키의 차 유리와 그의 머리를 차례로 관통하고 피는 사방으로 터지고 지나던 차량까지 마키의 차에 부딪혀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갑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에 <Love Letters>라는 부드러운 음색의 노래가 흐르고 장면은 무한정 느리게 펼쳐집니다. “이 장면의 아이디어가 바로 이 영화가 가리키는 ‘킬링 소프틀리’다. 우리는 영화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아 당신의 기대를 저버리는 무언가, 그러니까 자장가 같은 살인을 창조하기를 원했다”고 감독은 말했습니다.

감독은 이 장면이 아름답기를 바랐다고도 했습니다. 이 영화를 좋아합니다만 이 장면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감독의 말에는 공감하지 않습니다. 너무 과시적이어서 좀 꺼려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장면을 촉발시킨 어떤 시각적 욕망에 강한 호기심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또 한편의 영화를 불러옵니다. 실은 <킬링 소프틀리>를 처음 보았던 2012년의 어느 날로부터 그 며칠 전에, 한편의 한국영화에서 이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고 그 영화의 장면과 이 장면이 모종의 연관을 맺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걸 잊고 있다 얼마 전에 떠올린 것입니다. <킬링 소프틀리>와는 소재도 형식도 장르도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한국영화. 제목을 듣고 나서 정말이냐며 의아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말하자면 <은교>의 한 장면입니다. 문제의 장면을 기억합니다. <은교>의 원작자 박범신은 이 장면을 두고 “원작을 뛰어넘었다”고 극찬했습니다. <은교>의 DVD 오디오 코멘터리에서 한 스탭은 “(관객의) 최고의 반응을 끌어낸 장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킬링 소프틀리>의 장면처럼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 것은 아니지만 <은교>의 이 장면은 영화의 전반적인 톤과 무척이나 달라서 오히려 잊히지 않습니다. 극중 서지우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에 이르는 장면입니다.

스승 이적요(박해일)와 그가 사랑하게 된 십대 소녀 은교(김고은) 사이에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김무열)가 있습니다. 서지우가 은교와 정사를 나누는 걸 목격한 이적요는 분노에 차서 서지우의 차를 몰래 망가뜨립니다. 가까스로 차 사고를 면한 서지우는 일부러 누군가 차량을 훼손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스승이 한 일임을 직감합니다. 그는 스승에게 따지러 가는 도중에 앞선 차량을 추월하려다 마주 오는 차량과 부딪혀 절벽 아래로 떨어집니다. 구르고 떨어지는 차량 안에 매달려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서지우의 모습이 몹시도 느리게 묘사됩니다. 그게 서지우의 끝이며 그가 죽자 이적요와 은교의 관계도 무언가 정리의 국면으로 돌입합니다. 이 장면은 갑작스럽게 등장했고 생경하고 예외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생경함과 예외성의 출처는 극도의 그 느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 한편은 할리우드에서 온 하드보일드 액션극이며 나머지 한편은 국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정통의 멜로극이 아닙니까. 하지만 이 두 장면을 관할하는 시각적 욕망은 혹은 시각적 무의식은 이 두 장면을 한자리에서 말하는 걸 가능케 합니다. 공통적으로 두 장면은 느린데, 느려도 너무 느립니다. 느려도 너무 느리다는 그 이상한 느낌이, 지금은 영화의 상투어로 취급될 정도로 흔해빠진 영화의 어법 한 가지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합니다.

가령 <킬링 소프틀리>의 저 장면은 초당 1천 프레임 또는 2천 프레임이 가능한 신종 카메라 ‘팬텀’으로 그리고 1만2천 프레임까지 고속촬영이 가능한 군사용 카메라로 촬영되었습니다. <은교>의 기술사항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와 유사한 촬영의 기술에 의존했거나 적어도 그런 방식을 추구했음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은교>도 그 순간 고속촬영(카메라의 초당 프레임 수를 빠르게 돌리면 영상은 우리 눈에 오히려 느리게 보입니다)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두 장면은 적어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나의 영화적 어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고속촬영에 의한 슬로모션, 그것도 신종 출현한 극한의 초슬로모션입니다. 이것이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저 두면이 제게 가져다준 호기심의 본론입니다. 먼 곳에 떨어져 있어 보이는 두 장면은 어쩌다 서로 교차점을 갖게 된 것일까요. 혹은 이 교집합을 전제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 슬로모션은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요.

슬로모션에 관한 한 불가피하게 거쳐야 할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속도의 문제입니다. “속도는 영화 장치의 발명품이다.”(폴 비릴리오) 그럴 겁니다. 건축과 문학과 미술과 연극보다 그리고 어쩌면 음악보다도 더, 속도의 문제는 영화에서 원천적이며 직접적입니다. 속도란 기본적으로 물리적 차원 안에 있는 속성이므로 공간의 향방과 그 안에서의 움직임과 그에 따른 시간의 지속에 민감하게 관련되어 있는 영화에서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정이 이렇다고 하여 폴 비릴리오의 속도학 내지는 질주학으로 불리는 그 성찰에 무작정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인 것 같습니다. 비릴리오의 성찰은 현대 인류에 닥친 속도의 가속화에 따른 과정과 결과들을 경쟁과 대치와 투쟁과 전쟁의 국면으로 파악한 독창적인 역사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지금 우리의 호기심과는 거리가 있는 주제이며 방법론입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말해보겠습니다. 속도를 ‘스피드’라고 말해보는 것입니다. 스피드라는 영어는 “되어나가다, 번영하다, 빨리 진행되다” 등의 어원과, 독일어 ‘schnell’은 “용감한, 영웅적인, 강한, 용맹한” 등의 어원과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무한 미디어>를 쓴 매체학자 토드 기틀린이 이 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얼마나 빠른가 하는 문제는 얼마나 용맹하고 번영하는가의 문제와 자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영화의 스피드란 대개 ‘스릴’과 연동된 문제로 생각되는 측면이 있는데, 그때 그 스피드와 스릴은 용맹한 영웅이 끝내 번영을 이루는 액션 활극에서 종종 가장 중요한 항목이 되곤 합니다. 영화의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가볼까요. 예컨대 미국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피스의 대표작이며 특정 장면에서는 액션 활극의 모범을 보여주기도 하는 <국민의 탄생>에는 번영과 영웅과 강함과 용맹함을 반영하는 스피드와 스릴의 모티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스피드와 스릴의 추종자였던 그리피스는 강도를 높이기 위해 작품에 따라 저속촬영하기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리피스의 야심과는 다르게 오늘날의 관객인 우리는 저속촬영으로 빨라진 인물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스릴보다 는 웃음을 짓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하여간에 스피드와 스릴이 액션영화를 만드는 지금의 감독들에게도 심각한 고민거리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속도를 스피드의 문제로만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부족하고 허탈합니다. 그러니 다시 이렇게 말해보겠습니다. 속도를 ‘템포’라고 말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의 속도에 대하여 생각할 때 반드시 물리적 속성의 관여뿐 아니라 음악적 속성의 관여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피드라고 하는 대신 템포라고 말할 때 비로소 영화의 속도는 빠름이 아니라 느림의 차원에서도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피드가 빠름의 정도에 치우쳐 있다면 템포는 느림의 정도까지도 넉넉하게 포괄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의 템포의 조정이란 실로 다양하여서 창작자는 프레임 수를 조정할 수도 있고 팬과 트래킹으로 카메라의 무빙을 조정할 수도 있고 대사의 흐름을 조정할 수도 있고 숏의 길이와 개수를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영화는 템포상 빠르게도 느리게도 느껴질 것입니다. 그중 하나, 모션이 슬로하다는 것은 인물과 사물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움직임과 관련한 영화적 속도의 속성을 스피드가 아니라 템포의 차원에서 어법화한 것이 슬로모션입니다. 우리는 이 슬로모션에 얼마나 친숙한지요. 가까운 예도 하나 갖고 있지 않습니까.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극장가를 주름잡았던 그것,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한때 홍콩 누아르라고 불렀던 일련의 홍콩 액션영화들. 얼마나 많은 그 영화들에서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주윤발의 입가에서, 유덕화의 눈매에서, 장학우의 손끝에서, 장국영의 발걸음에서 우리는 슬로모션을 보고 또 보았습니까. 홍콩 액션영화는 늘 이중의 과잉 신공을 펼쳐왔습니다. 첫째는 동작의 과잉입니다. 슬로모션이 동작의 과잉을 더 높은 과잉의 차원으로 승화했다는 건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그 동작의 과잉이 빚어내는 감정의 과잉입니다. 역시나 그 감정의 과잉은 슬로모션을 통해 극도의 비장함이라는 더 높은 과잉으로 종종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이 비장한 홍콩 액션영화의 동작과 감정, 그걸 이행하는 슬로모션을 희극적 차원에서 유능하게 갖고 놀아본 창작자는 다름 아니라 주성치였습니다. 한때 도박과 카지노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올 때 그가 주연한 <도성>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흡사 여느 영화의 그것처럼 느리고 또 비장한 속도로 주성치가 카지노로 들어섭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건 영화의 장치적 효과가 아니라 그 자신이 주변의 배우들보다 훨씬 과장되게 느린 속도로 몸을 움직여서 내는 효과입니다. 이른바 우리는 그것을 두고 깔깔 웃으며 주성치식 인간 슬로모션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주성치와는 정확히 반대된 자세로 홍콩 액션영화의 거의 상투가 되어버린 슬로모션을 숭고한 무드의 차원으로 끝내 끌어올린 건 두기봉입니다. 두기봉의 사내들이 총격전을 벌일 때 그 장면들은 우아합니다. 그 우아함이 기대는 것들 중 하나가 슬로모션이라는 템포가 주는 속도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순간 두기봉의 영화는 그가 공기(분위기)라고 말한 바로 그 무드에 빠져들면서 국수통을 들고 국수를 사러가는 왕가위식 사랑의 속도 내지는 무드와 만나게 되는 기적 같은 교감의 순간을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In the Mood for Love’(<화양연화>의 영어 제목)가 있다면 ‘In the Mood for Action’도 있는 것이겠지요.

라스 폰 트리에의 슬로모션: 가독성

이제 슬로모션에 연관한 두 번째 문제를 말하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 이 점은 어느 면에서 속도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데도 잘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보는 것’의 문제입니다. 슬로모션의 시각적 역량은 속도의 느림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좀더 명료해질 것 같습니다. 어떤 장면의 속도가 평소보다 훨씬 느려졌다고 해보지요. 그래서 그때 우리가 얻는 시각적 이점은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그 장면은 느려졌습니다. 느려졌으니 연장되었습니다. 연장되었으니 선명하게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육안의 능력이라면 순식간에 지나가버려 못 볼 일을 지금 이 기계의 조작으로 느리게 오래 그리고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총에 맞아 죽는 마키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서지우를 느리고 오래 선명하게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기술이 발달할수록 그 능력치는 더 높아질 것이고 지금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가 그 가장 최신의 예입니다. 즉, 슬로모션이 등장할 때마다 우린 속도의 문제뿐 아니라 시각적 ‘가독’의 문제도 함께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멜랑콜리아>의 슬로모션 프롤로그를 본 마틴 스코시즈가 라스 폰 트리에에게 “당신의 영화가 좋다, 특히 첫 장면이”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라스 폰 트리에가 그 앞에서 잘난 척을 좀 한 모양인데, 그러고 나니 칭찬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니라 마틴 스코시즈였다는 점을 깨닫고 겸연쩍었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상대는 영화 역사상 가장 선구적인 슬로모션을 연출한 것으로 평가받는, 바로 <분노의 주먹>의 섀도복싱 장면을 연출한 그 마틴 스코시즈가 아닙니까.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이 이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라스 폰 트리에가 슬로모션에 관하여 문득 이렇게 말합니다. “이면을 비춘다는 점에서 그건 엑스레이(X-ray)와 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멜랑콜리아>의 슬로모션은 지금 우리의 논의와는 또 다른 차원에 있으니 잠시 배제하더라도 그의 이 말은 반드시 챙겨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슬로모션에 관해 그가 지나치듯이 한 이 말은 사실 탁월한 정의입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슬로모션에서 속도보다도 가독의 문제를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가독을 그의 말에 빚지고 고치면 ‘투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멜랑콜리아>의 첫 장면이 그러한 것을 겨냥했을 것입니다. 이면의 투시 말입니다. 그는 왜 엑스레이로 비유했을까요. 엑스레이가 보이지 않는 것을 투시하고 가독하는 이미지의 발명품이라는 뜻에서 그러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 시각적 투시와 가독의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건 연예와 스포츠와 의학과 군사 분야입니다. <무한도전>에서 정형돈이 그냥 공인 줄 알고 헤딩했으나 실은 그 안에 물이 가득 차 있을 때, 그의 찌그러지는 우스꽝스러운 얼굴은 고속촬영에 의해 포착되어 선명하게 가독될 수 있기에 웃음을 유발합니다. 야구선수 이승엽이 쳐낸 저 공이 홈런인지 파울인지 심판의 육안으로 판독이 불가능할 때 심판들은 모여서 기계가 느리게 보여주는 화면에 기대어 마침내 판정을 내립니다. 축구선수 박지성이 찬 볼이 얼마나 아름답게 골문으로 들어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카메라는 느린 화면을 선택하고 거기에 다중각도와 반복의 문제를 더하면서, 원래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그 비가시적 순간을 가시적 순간으로 연장하여 가독의 능력을 부여한 뒤 우리의 감흥을 끌어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의학적, 군사적 투시와도 연을 맺습니다. 째거나 뚫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저 환자의 뼈와 내장의 상태를 엑스레이는 투시하고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미국은 최신의 광학적 군사 무기로 알카에다가 꽁꽁 숨겨놓아 보이지 않는 그들의 심장부를 찾아내려 할 것입니다. 자신의 슬로모션을 엑스레이에 비유했을 때 라스 폰 트리에는 탁월하게도 바로 이 문제, 슬로모션이 발생시킨 이미지의 가독성 및 투시성의 문제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린 슬로모션의 속성으로 영화의 속도성과 가독성(투시성)의 문제를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앞서 했던 구체적 질문에 서서히 다시 답해야겠습니다.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장면에서 슬로모션은 어떤 소용으로 쓰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이때 무엇보다 두 영화의 서사적 국면을 먼저 고려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적어도 이 두 장면에 관한 한, 이 영화의 서사는 무언가 인류사의 중대한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입니다. 그걸 말하기 위해 잠시 샛길로 들어가 미국의 영화평론가 로빈 우드가 샘 페킨파의 영화에 관하여 말했던 것을 상기해보겠습니다. 로빈 우드는 샘 페킨파의 영화에 관해 기술하는 짧은 글에서 슬로모션을 다소 상투적이고 대중 친화적인 것으로 평가 절하합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맥락상의 예를 들기 위해 가져온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와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 관해서는 좀 특별한 말을 남깁니다. “슬로모션의 사용은 일종의 의식(celebration)의 측면을 불러일으킨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슬로모션은 영화에서 강하게 강조된 ‘종교의식’(ritual)의 측면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 슬로모션은 두 주인공이 영원불멸의 전설 속으로 사라지는 신화의 순간을 강조하고 있다.”

폭력과 성스러움, 그 제의성

의식, 종교의식, 신화의 순간, 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주십시오. 저는 이 말들을 묶어 ‘제의성’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듣고 보니 그의 말대로입니다. 비단 그가 예로 든 영화들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종종 슬로모션을 볼 때 제의적 인상을 받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대개 그런 경우는 영화의 서사가 폭력이나 죽음에 운명이라는 조건하에서 근접해 있는 경우들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결말에서 인물들이 기관총을 맞고 죽어갈 때, 두기봉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죽을 것이 빤한 총격전을 감수할 때 우린 그런 감정에 닿곤 합니다. 하지만 로빈 우드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직감적으로 탁월한 묘사력을 발휘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너무 사소하게 생각하고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는 이내 다른 말로 접어듭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그가 사소하게 남긴 그 말을 가져오는 것이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그 장면들을 생각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의성과 슬로모션 사이에는 종종 깊은 관계가 맺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서사가 제의적이라는 공감대가 반드시 형성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점을 말하기 위해 두 가지의 근거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는 영화 속 대사이고 하나는 감독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킬링 소프틀리>에서 마키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그는 죽어야 한다면서 살인 청부업자 잭키가 이렇게 말합니다. “거리 패거리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마키가 똑같은 짓을 두번이나 꾸미고도 대충 맞고 끝났다고 생각해. (마키가 한 게 아니잖아, 라고 상대방이 말하자) 그래도 마키 책임이야. 전적이 있으니 일이 터지면 사람들이 오해해도 감수해야 된다고.”

이 대사만큼 흥미로운 건 <은교>의 감독 정지우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서지우의 죽음 장면에 관하여 한 말입니다.“서지우의 사고 장면을 굉장히 길게 보여준 이유는 뭔가”라고 <씨네21>이 묻자 “충돌의 스펙터클은 최소화하되 서지우가 벌받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도덕적인 의미의 징벌은 아니었고, 서지우가 어느 순간엔가 멈췄으면 좋았을 몇 가지 일들에 대한 결과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고 답했습니다. 마키는 잘못한 일이 없지만 전에 잘못한 것이 있으므로 지금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야 합니다. 서지우는 도덕적 징벌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죽음이라는 비참한 운명적 최후를 비껴가서는 안되는 인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이 서사적 조건이 제의라면 과연 어떤 제의일까요.

인류는 신에게 오랫동안 제를 올려왔습니다. 제를 올릴 때는 반드시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문학평론가이며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의 언급이 있기 전까지 이 희생양은 신의 화를 풀어주어서 그의 은혜와 은총을 입겠다는 인류의 소망 행위로 풀이되었습니다. 하지만 르네 지라르의 말에 따르자면 희생양을 바칠 때 인류는 사실 신의 뜻과 은총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헝클어진 기존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내적 폭력을 성스러움으로 가장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키와 서지우는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마키는 그들 밑바닥 세계의 질서를 위해서, 서지우는 이적요와 은교의 사랑과 이별이라는 영화의 내적 질서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이 제의라면 그것은 희생제의입니다.

희생제의에 관한 가장 잔혹하고도 명쾌한 정의는 김지운의 영화 <달콤한 인생>에 나옵니다. 최근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그가 농담 삼아 이 대사를 암송하는 걸 들었는데, 그 순간 저는 이것이 희생제의에 관한 촌철살인의 정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우(이병헌)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자 보스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 사장(김영철)은 선우를 겨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조직이라는 게 뭡니까. 가족이라는 게 뭡니까. 오야가 누군가에게 실수했다고 하면 실수한 일이 없어도 실수한 사람은 나와야 되는 거지요.”

마키는 지금 실수하지 않았지만 지난번에 실수했으므로 지금 실수한 사람이 되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스승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는지 은교에 대한 숨겨진 욕망 때문이었는지 불분명하지만, 서지우가 은교와 섹스를 한 것이 죽을 만한 도덕적 불경함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실수한 사람은 나와야 합니다. 도덕적 징벌은 아니더라도 그래야만 이적요와 은교의 서사적 관계가 제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적요는 늙어가고 은교는 자라나는 것이 그들의 질서입니다. 적어도 감독은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 점은 서지우가 죽는 과정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서지우는 이적요가 망가뜨려놓은 차 때문에 죽은 게 아닙니다. 그는 이적요의 덫을 피했지만 그러자마자 죽었습니다. 사람(이적요)의 살해 시도는 피하게 되지만 그걸 피해나가는 순간에 재차 찾아온 운명으로서의 죽 음은 피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서지우의 죽음은 사람의 소관이 아니라 운명의 소관에 의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게 됩니다. 서지우는 인간사 질서의 회복을 위한 필요 때문에 죽었지만, 겉으로는 운명적으로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투시와 가독, 그리고 전시

이렇게 하여 우리는 두 영화의 서사에 희생제의가 깃들어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두 영화의 감독은 강력한 초슬로모션이 사용되어야만 제의적 가치가 더 강력해질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두 장면에서 슬로모션은 서사적 제의성을 위한 시각 보조 장치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밀도로서 이미지의 제의성을 강력하게 작동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지막 핵심은 당연히도 이미지의 제의성이라는 이 부분에 모아져야 하는 것이겠지요.

예컨대 앤드루 도미닉이 감명받은 <에디 코일의 친구들>과 그의 영화 <킬링 소프틀리>를 짧게 비교해보겠습니다. <에디 코일의 친구들>도 실은 서사의 정점에서 유사한 희생제의가 펼쳐집니다. 무기 밀매상 에디(로버트 미첨)는 조직의 명령을 받은 살인 청부업자로부터 차 안에서 살해당합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냉혹함마저 풍깁니다. 감독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만, 저는 이 장면이 <킬링 소프틀리>의 장면과 연계되어 있다고 상상합니다. 탕 하는 격발, 깨지는 유리창, 총알이 박혀 흔들리는 희생물의 몸, 액션의 모든 조건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슬로모션이 없고 <킬링 소프틀리>에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장면에 초슬로모션을 도입한다면 <킬링 소프틀리>의 장면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에디 코일의 친구들>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양 그 일이 일어나 냉혹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반하여, <킬링 소프틀리>에서는 초슬로모션이 등장하여 이 희생제의를 어쩐지 쓸쓸한 야유와 조롱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감독은 이 장면을 아름답다고 했지만 저는 쓸쓸함과 우울함이 이 장면의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니라 저는 <에디 코일의 친구들>과 <킬링 소프틀리>의 비교로 같은 서사적 제의라도 이미지적 제의의 개입에 따라 어떤 차이가 나는지 말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교>에 관해서는 더 짧게 말하겠습니다. 왜 원작자 박범신은 그 장면을 두고 원작을 뛰어넘었다 말했을까요. 원작자가 영화에 보내는 의례적 차원의 칭찬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그가 서사적으로 묘사한 부분 이상으로 이미지가 활동한 것이 만족스러웠다는 뜻이겠지요. 서사적 제의가 아닌 이미지적 제의의 가치를 환영한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장면들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슬로모션의 속도성과 가독성(투시성)을 다시 불러내야 합니다. 먼저 속도라 불리는 템포의 문제에서 우린 초등학생의 자세로 재차 물어보아야 합니다. 제의적 서사가 있고 거기에 슬로모션이 아니라 패스트모션이라는 시각적 장치가 도입된다 해도 그 제의성은 여전히 지금처럼 성립될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가령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그 장면이 패스트모션으로 처리됐다면 우린 과연 지금의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인지요. 패스트모션으로 제의적 감정을 표현하는 영화를 저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의적 장면에는 슬로모션이 적합하고, 패스트모션은 그에 적합하지 않다고 본능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빠른 템포가 아니라 느린 템포가 적당하다고 느낀다는 것이지요. 그럼 왜일까요. 생각해보면 단순하고 명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보 폭탄의 사회라고 비릴리오는 불렀습니다. 정보의 양이 스피드에 비례한다는 건 누구보다 지금을 사는 우리가 체험적으로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스피드는 미래와 진화라는 체계가 요구하는 절대 감각입니다. 반면에 느림이라는 템포는 무엇에 소용되는 것일까요. 여기에 사회적 통념이 가동되고 있음을 우린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우린 느린 사람을 뒤처지는 사람이라고 종종 생각합니다. 느리면 과거라고 생각합니다. 속도를 지각하는 방식으로 시간의 전후를 결정하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상 이상으로 느린 이미지의 템포는 역으로 어떤 인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오래된 과거의 성질을 불현듯 떠올리게 한다고 말할 순 없는 것일까요. 말하자면 이미지의 템포가 시간성을 관할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초슬로모션의 그 극한의 느린 템포는 은연중에 우리에게 그것이 먼 과거의 감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 같습니다. 원시적, 고대적 성질에 공감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감정상태가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서사적 희생제의가 일어날 때 그에 못지않게 강력하게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창작자와 우리 모두에게 말입니다. 희생제의가 가장 중요하고 왕성했던 것이 고대의 원시사회였다는 사실을 우린 모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슬로모션의 가독성과 투시성은 또 어떠할까요. 투시와 가독은 물론 현대 문명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슬로모션이 초슬로모션이 된 것도 기술의 무한 발전 덕분이며 그로써 투시와 가독의 힘은 더 융성해진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이 기술은 역설도 함께 지닌 것 같습니다. 일반의 육안으로는 보지 못했을 마키와 서지우의 죽음을 우리는 기계 기술의 힘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발전된 문명의 기술 덕분에 보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의 이미지(마키와 서지우의 죽음)가 보통 이상으로 선명해지고 과장된다면, 그건 어떤 가치가 높아진다는 뜻일는지요. 어쩌면 그 이미지의 전시적 가치가 높아진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느려지고 늘어나고 선명해지다 보니 전시성은 강화된 것이라고 말할 순 없는 것인지요. 슬로모션은 투시와 가독을 증대함과 동시에 그 장면의 전시적 가치를 증대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슬로모션의 투시성과 가독성이 갖는 역설입니다.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베냐민은 말했습니다. 고대에는 예술작품의 제의적 가치가 전시적 가치보다 월등했던 것에 비해, 현대에 올수록, 특히 사진과 영화가 출현하면서 예술작품의 전시적 가치만이 더 강성해졌다고 말입니다. 물론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그 장면은 제의적 감정을 갖고 있거나 그걸 빗댄 것이지 1차적으로 제의하려는 의미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베냐민의 생각은 이제 좀 다르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요. 혹은 초슬로모션의 출현이 그 생각의 변화를 요구하는 새로운 감각은 아닐는지요. 가령, 이 영화의 초슬로모션은 끝내 무엇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가요. 죽어가는 마키의 얼굴과 서지우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얼굴은 베냐민 스스로 말한 제의적 가치의 마지막 보루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으로부터 파생한 영화가 그 예술품 자체로서 제의적 가치의 면에서 하락했을 수는 있으나, 예컨대 슬로모션이 쓰이는 개별의 장면에 국한한다면, 그 전시적 가치는 오히려 높아지고, 전시적 가치가 높아질수록 비록 2차적 모사라 할지라도 제의성을 재현해내는 경우는 더러 있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아우라의 인위적 모사가 가능해지다

결국 이것은 느낌의 문제로 모아질 것입니다. 베냐민은 광학적 무의식의 예 중 하나로 고속촬영(그러니까 슬로모션이겠지요)을 들면서 “빠른 움직임을 천천히 진행시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는 듯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그리고 이 세상 밖에 있는 듯한 움직임”이라고 한 루돌프 아른하임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한 아른하임의 표현으로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우리는 이제 여기에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에 등장하는 프롤로그도 포함시킬 수 있게 될 겁니다. 지구가 멸망하는 이야기를 마치 중력 바깥의 환경에 놓은 듯한, 그러니까 미끄러지는 듯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이 세상 밖에 있는 듯한 초슬로모션으로 시작했던 그 영화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소론은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저는 배우가 기계 장치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을 근거로 혹은 영화가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점을 근거로 연극배우의 연기에는 아우라가 있지만 영화배우의 연기에는 아우라가 없고, 영화는 아우라를 상실한 예술품이라는 의견에 얼마나 공감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우라의 모사란 있을 수 없다, 아우라란 사람의 여기와 지금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베냐민)라고는 들었습니다만, 그 점도 잘 믿겨지진 않습니다. 슬로모션을 보는 우리는, 가장 최초에, 이 장면은 이상하다, 하고 느끼는 것 아닙니까. 그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특수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이상하다는 것 아니던가요.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그 장면을 보고도 그렇게 느꼈던 것 아니던가요. 그것이 슬로모션의 속도의 작동이든 투시와 가독의 작동이든 그 이중의 작동이든, 하여간에 그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였던 기분을 저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 관한 한 저는, 나의 액션의 핵심은 ‘분위기’(공기)의 문제라고 말한 두기봉의 슬로모션을 더 믿는 쪽입니다. 두기봉의 그 분위기의 슬로모션을 무작정 아우라라고 말할 순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왜 광학적 무의식과 아우라의 문제를 따로 떼어서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영화에서 그 둘은 서로 종종 연계된 것은 아닌지 저는 자문하고 싶습니다.

“여기, 지금”의 일회성이라는 아우라를 영화적으로 모사하기 위해 광학적 무의식이 개입하는 예가 바로 슬로모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더 잘 모사하기 위해 등장한 고도의 광학적 무의식이 지금의 초슬로모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 실현의 성패 여부와 무관하게 말입니다. 여기, 지금, 그러니까 희생제의가 벌어지는 여기, 지금의 일회적 분위기를 시각화하고 전시하고자 하는 광학적 무의식의 개입이 아니라면 도대체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저 장면의 느낌은 무엇이라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말입니다. 단 한번이라는 일회성의 순간을 늘이고(속도), 보여주고(투시, 가독), 경험하게 하려는(느낌) 영화적 아우라, 아무래도 저는 광학적 무의식으로 그 아우라를 인위적으로 모사하는 것이 슬로모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쭙잖은 생각을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간을 빼앗았다면 미안한 맘이고 말이 안되는 건 무시해주십시오. 하지만 이제 말을 끝내가는 저는 겨우 서투른 서론을 쓴 기분입니다. 그런데도 사족을 덧붙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영화의 속도란 언제나 가변적일 것이고 비가시적 영역에서 가시적 영역으로의 전환이란 언제나 가능할 것이며 그리하여 영화는 아우라를 모사하려는 광학적 무의식의 개입에 언제나 무방비일 것입니다. 그러니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그 두 장면은 사소한 공통점이 아니라 무관해 보이는 두 영화 속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난 중대한 영화적 성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서로 형제인 줄 모르고 떨어져 지낸 형제가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가계의 형제들에게만 내려져 온다는 어깨의 점 같은 것을 서로 확인하는 그런 것일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우연한 기회의 마주침 이후에야 지금 이 세계의 혹은 이 영화 세계의 어떤 무의식적 상태를 가늠해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런 계기가 제게는 <킬링 소프틀리>와 <은교>의 그 장면이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모르고 지내는 영화적 형제들이 아마 여기저기 더 살아가고 있을 것으로 저는 내심 추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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