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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범속한 구원의 자리, 박윤희 평론가의 <트루먼의 사랑>

피터 위어의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마주했던 가짜 세계는 완벽하게 통제된 거대한 스튜디오 세트장이었다. 그러나 김덕중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트루먼의 사랑>에서 인물들이 마주하는 거짓 세계는 잘 꾸며진 스튜디오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숨 쉬고 부대끼는 일상 그 자체다. 영화의 출발점은 대단히 기이하면서도 명징하다. 지연은 어느 날부터 세계가 멈추고 사람들이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정형행동처럼 기계적 반복에 갇히는 ‘에러’와 ‘프리즈’ 현상을 목격한다. 타인들은 시스템의 부속품인 ‘라이어’ 혹은 고장 난 인형처럼 굳어버리지만, 오직 자신만은 그 시간에서 자유로운 유일한 ‘트루먼’이라는 자각이다. 이 SF적인 설정은 단순한 장르적 쾌감을 넘어 오늘날 청년세대가 체감하는 사회적 지형도를 투사한다.

아무리 스펙을 쌓고 자기 계발에 매달려도 계층이동의 사다리는 끊어졌고 사회 전체는 정지된 화면처럼 마비되어 있다. 이 무력감 속에서 개인은 인지부조화와 고립에 직면한다. 세상은 명백히 고장 났고 오작동을 일으키는데 사회는 개인의 결핍만을 탓한다. 이때 청년 주체가 선택할 수 있는 방어기제는 바로 영화 속 지연의 망상적 자기규정과 맞닿는다. 내가 이상하고 실패한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이 세계 전체가 에러에 걸린 가짜라는 선언이다. 김덕중 감독은 지연(이주우), 현식(배유람), 문성(김신비)의 삼각관계를 통해 이 실존적 고립과 불신의 드라마를 세밀하게 직조해나간다. 세 인물의 만남과 충돌은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삼각관계를 넘어 ‘고장 난 세계에서 타자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존재론적 태도를 대변한다.

삼각구도 속에 투사된 불신과 구원의 역학

<트루먼의 사랑>

지연은 ‘속기사’이자 최초의 자각자다. 세계의 균열을 먼저 포착한 그녀는 스스로를 체제 바깥의 고독한 관찰자로 위치시킨다. 지하철 플랫폼 바닥에 누워 있다가 자신을 깨우는 현식에게 “내 얘기 좀 할게요”라며 다가간 지연의 행위는 자신의 실존을 증명해줄 ‘또 다른 트루먼’을 갈망하는 신호다. 현식을 통해 고립에서 벗어난 지연은 “너는 날 구해줬어. 그런데 나도 누군가를 구원해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라며 또 다른 타자에게 구원을 확장하고자 한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낭만적 감정의 교류라기보다 동반자인 존재를 이 거짓 세계에서 건져 올리려는 구원이다. 그러나 이 구원은 시작부터 위태롭다. 자신만이 온전하고 세상 모두가 고장 났다는 전제는, 타인을 온전한 주체가 아닌 불량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현식은 지연의 기이한 세계관에 전염되며 존재론적 도약을 겪는 인물이다. 지하철이라는 밀폐된 공간에 갇혔다가 지연과 함께 빠져나오며 현식은 “하루가 끝나고 새 하루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게 신기해. 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내뱉는다. 매일 일상을 반복하던 수동적 개인이, 타인과의 강렬한 마주침을 통해 시간의 연속성을 비로소 체감한다. 라이어의 배역을 벗어나 스스로 ‘다른 사람’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현식의 자각은 주체적 탄생을 알린다.

그러나 이 각성은 역설적으로 불안과 의심의 씨앗이 된다. 새로운 구원의 대상으로 문성을 끌어들인 지연을 향해 현식은 “문성은 트루먼이 맞아? 내가 매장에서 봤거든. 에러가 일어났을 때 문성도 에러에 종속되는 걸”이라며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 타인을 긍정하지 못하고 상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려는 현식의 태도는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을 끝없이 시험하는 현대인의 분열적 심리를 드러낸다.

문성은 지연을 사랑하면서도, 지연과 현식 사이에 흐르는 관념적 망상과 자기기만을 참아내지 못한다. 문성은 지연을 향해 정면으로 묻는다. “남현식이야, 나 류문성이야?” 문성의 질문은 인물들을 벌거벗은 사랑의 실존적 선택 앞에 세운다. 지연은 두 남자를 다 사랑하지만, 세 사람의 관계는 끝내 하나의 안정된 연대로 묶이지 못한다. 상대방을 ‘나를 완벽히 구원해줄 무결한 타자’로 상정하는 한, 타자는 언제나 나의 기대를 배반하는 ‘에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지연이 끊임없이 갈망하고 언급하는 ‘뉴질랜드’ 혹은 ‘바깥 세계’는 시스템으로부터의 완벽한 탈출을 상징한다. 지연은 세계의 바깥으로 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지연이 털어놓듯 유럽에 가도, 남미에 가도, 사막을 가도 그곳이 바깥은 아니었다. 공간의 이동은 결코 시스템의 내재적 모순과 실존적 불안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지연이 결국 현식과 문성을 뒤로하고 뉴질랜드로 떠났는지 아니면 이 체제 안에 남았는지는 모호하게 처리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지연이 결국 사랑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연의 구체적인 물리적 행방이 아니다. 어떤 선택이 최선의 선택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 그 자체다.

탈신비화와 일상적 돌봄의 회복

<트루먼의 사랑>

김덕중 감독은 이 닫힌 미로의 출구를 영웅적 탈출로 찾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 희선(강진아)은 문성이 빠져 있는 낭만적 자의식과 자기연민을 냉정하게 해체한다. 희선은 문성을 특별한 존재는커녕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부수어놓겠다고 말하며 역설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세상이 고장 나버렸다면 나 자신도 고장 난 척하면서 버텨야 하고, 나를 제외한 세상이 멈춰버리면 움직일 수 있더라도 못 움직이는 척 가만히 평온하게 있어야 한다.” 이 대사는 체제에 대한 비겁한 굴복이나 냉소가 아니다. 스스로를 트루먼으로 위치시키며 타자들을 모두 에러로 배제해온 오만과 피해의식을 내려놓는 성숙의 선언이다. 나만 깨어 있는 주체라는 선민의식을 버리고 모두가 이 불완전한 시스템 속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그런데 영화는 엉뚱하게 전혀 다른 장면을 슬쩍 끼워넣는다. 얼떨결에 아이를 맡게 된 경찰관들이 아이를 낯설어하면서도, 가습기와 난로를 켜준다. 누가 트루먼이고 누가 에러인지 따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돌본다. 영화는 묻는다. 세계가 조작된 각본이고 모두가 에러에 걸린 세상이라 할지라도, 눈앞에서 울고 있는 연약한 생명을 돌보고 밥을 챙겨 먹는 일상의 행위마저 거짓일 수 있는가? 완벽한 단 한명의 구원자나 완전무결한 바깥 세계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서로의 결핍을 묵묵히 보듬으며 일상을 지속하는 관계들 속에서 비로소 살아간다.

<트루먼의 사랑>은 불안과 불신의 늪에 갇힌 청년들에게 가혹하면서도 따뜻한 거울을 비춘다. 타인을 ‘에러’로 규정하며 혼자만의 방공호에 갇히는 자아도취를 멈추고, 나 역시 부서지기 쉬운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완벽한 탈출구(뉴질랜드)는 환상일지 모르나, 고장 난 세상 속에서 서로의 결핍을 응시하고 곁을 내어주는 태도만큼은 결코 거짓일 수 없다. 김덕중 감독이 직조한 이 기이한 멜로드라마는, 결국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진짜 구원이 거창한 시스템의 바깥이 아니라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범속한 일상의 한가운데 있는 것은 아닌지 조용히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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