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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추락의 해부>를 감싸고 있는 피로감
김신 2024-02-14

<추락의 해부>를 비평하는 방법은 간단해 보인다. 영화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사뮈엘의 돌연사를 두고 아내인 산드라의 연루 여부를 파헤치는 법정 공방을 다룬다. 그런데 종막에 이르기까지 진상을 밝히지 않고 여러 인물의 변론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니 진실이란 모름지기 모호한 것이며, 이 영화는 인간의 주관성이 얼마나 연약한지 보여주는 영화라고 요약하면 깔끔한 정리가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이 작품의 전부인가.

김철홍 평론가는 <씨네21> 20자평(1442호 참조)에서 인간 주관의 불완전성을 까발리는 기획이 이제 진부하게 느껴진다고 썼다. 그러게 말이다. 현실의 복수성을 지목하며 주관적 인식의 한계를 지목하는 전략은 이제 꽤 익숙한 화법이 됐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그 익숙함을 근거로 <추락의 해부>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추락의 해부>에는 쥐스틴 트리에가 법정 공방을 통해 최종적 진실에 도달하거나, 반대로 그 도달에 실패하는 부조리극을 그리며 인식의 한계를 탐문하는 방향에 애초에 관심이 덜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미묘한 이물감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 영화는 인물들의 주관이 포착하지 못했던 진실이 새롭게 폭로되는 국면에서 인물의 내면과 판결이 극적으로 전환되는 서사구조를 도입하지 않았다. 검사측이 제기하는 자료와 증언은 비단벌레의 광택처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변화할 소지가 있어 판결을 확정할 결정적 단서가 되지 못하며, 산드라 또한 그 점을 차분하고 논리적인 어조로 지적한다.

또한 영화는 산드라가 용의자로 지목된 직후에도 경찰의 기자회견, 기자들의 보도화면처럼 산드라의 주관적 시점이 배제된 무인칭적인 화면을 외삽해 사건의 추이에 대한 설명을 대신한다. 이는 진상을 직시하거나 외면하려는 용의자의 죄의식에 대한 초점이 의도적으로 약화돼 있다는 뜻이다. 대신 영화는 산드라가 다니엘과 피아노 치는 장면, 뱅상과 잡담하는 장면처럼 판결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일상적 묘사를 의아스러울 정도로 길게 보여주며 서스펜스의 리듬을 이완시킨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주관성의 한계를 문책하는 진실 공방을 진부하게 반복한다기보다, 차라리 그런 탐문이 진부해져버린 세태의 피로감을 자의식적으로 드러내려는 작품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피로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그 피로감은 우리의 주관적 판단과 책임의 자율성을 객관화된 외부의 매개체를 경유해 증빙해야만 하는 현대적 상황과 밀접한 것 같다. 트리에가 그 피로감을 물질화하기 위해 취한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법정이라는 공간을 무대화하는 것이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말처럼 법정이란 윤리나 진실 같은 고결한 가치를 설정하는 곳이라기보다, 그냥 법률적 귀책 여부를 결정하는 기판력을 산출하는 공간이다. 법정에서 우리는 윤리적 소명 대신 주관성과 분리된 외부의 사법적 서약에 대한 책임을 부과받는다. “법정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역사가 더이상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곳”이라고 말한 트리에는 이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산드라에게 뱅상은 “법정에서는 진실보다 남들이 당신의 행동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두 번째 전략은 법적 상황의 피로감을 오늘날의 하이퍼미디어적 조건에 대한 성찰과 결부시키는 것이다. 뱅상의 말처럼 우리를 타자화하는 시선이 우리를 구속한다면, 인간의 미시적 행동을 시청각적 데이터로 낱낱이 망라하는 데이터베이스적 환경은 그 구속의 강도를 심화했다. 기술의 발달이 그저 인식의 확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낙관하던 시절의 우리는 알지 못했다. 우리의 감각이 외부의 매개체에 의해 대리되거나 보강된다고 해도, 그 대리된 감각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개별적 인격체에게 전가되면서 개인의 부담감을 가중할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산드라를 둘러싼 공방에서도 우리는 산드라의 자율적 의지 대신 그 자율성을 대리할 수 있다고 가정되는 온갖 간접화된 증언과 추측, 시청각적 자료 더미에 대한 심문이 이뤄지는 상황을 본다. 이 영화는 맹인견을 통해 시각을 대리하는 다니엘, 혹은 자신이 쓴 소설 속 인물의 범죄적 상상력에 대한 결백을 항변하는 산드라처럼, 자신의 자율성을 여러 매개체에 위탁하는 인물이 그 위탁된 감각에 대한 책임조차 부담해야만 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나온다. 그 과잉된 부담감이야말로 <추락의 해부>가 주목하는 우리 시대의 피로감의 정체이며, 이는 비단 영화 속 상황만이 아니라 인플루언서가 누구의 게시물에 ‘좋아요’ 버튼을 눌렀네 마네 하는 문제로 소모적인 시비를 따지고 있는 우리의 기막힌 현실과도 상통하는 문제다. 물론 산드라의 말처럼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외화된 자아의 일부가 우리의 자율성과 고스란히 일치한다는 검사측의 주장 또한 편향의 여지가 다분하다. <추락의 해부>는 마치 그 편향에 반박하겠다는 듯, 절대적인 물증이 부재한 다니엘의 기억이 산드라의 무죄 선고를 이끄는 결정적 요소로 작동하는 결말에 도착한다.

주체의 내면적 결단이 대리된 매개체에 의해 의문시되거나 상대화되는 상황이 일상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근래에 <보 이즈 어프레이드>나 <괴물>처럼 주관적 진실을 의문시하는 서사들이 어째서 그토록 자주 발견되는가에 관한 하나의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가설은 그 영화들이 우리의 주관을 끝없이 상대화하는 하이퍼미디어적 조건에 대한 히스테리를 일종의 피학적 징후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추락의 해부>가 그런 계열의 서사 중에서 각별해 보인 이유가 있다. 영화가 그 히스테리를 마조히즘적으로 향유하는 <보 이즈 어프레이드> 같은 영화와 달리, 그 곤경에 당당하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맞서는 존재의 투쟁을 지그시 응시한다는 점이다.

관련해서 나는 산드라를 연기한 잔드라 휠러라는 배우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빼놓고 이 영화를 말할 수 없다고 느낀다. 다수의 국내외 평자들은 이 영화 속 잔드라 휠러의 연기에 열광했는데, 나는 이같은 열광에도 얼마간 징후적인 측면이 있다고 본다. 이 영화뿐 아니라, <토니 에드만>과 <인 디 아일>에서도 잔드라 휠러는 감정을 극적으로 표출하는 대신 고요하게 감내하며 현실적인 문제를 현실적으로 헤쳐나가는 인물의 초상을 체현하곤 했다. 그 과묵한 자세는 이상이 사라진 세계를 견디는 현대 노동자들에게 허황되지 않은 진실한 위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잔드라 휠러 본인에게는 약간 실례가 되는 말일지 모르겠다만, 나는 그를 보고 종종 존 포드의 서부극 속 존 웨인을 떠올렸다. 약간 처진 눈매와 볼살, 형형한 빛을 뿜는 눈동자, 웃음기가 사라진 입매…. 외견상으로도 흡사한 두 배우는 무엇보다 무표정을 유지하며 이상이 사라진 세계를 견디는 단독자의 쓰라림을 체화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영화평론가 스테파니 자카렉은 <추락의 해부>의 산드라가 일반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히로인과 달리 미소를 짓지 않는다는 점이 그녀의 감정을 더 강렬하게 드러낸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수색자>의 존 웨인이 감정을 표출하지 않을수록 그의 연기가 위대해진다고 했던 영화 연구자 에드워드 버스콤브의 말과 겹쳐 보인다. <추락의 해부>는 약간 삐걱거리는 구석도 있는 영화라고 느꼈지만, 지금은 그저 버거운 현실을 버티는 잔드라 휠러의 무표정을 눈에 새긴 채 영화의 여운을 곱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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