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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렇게 가족이 되지 못했다
김혜리 2018-08-15

*<어느 가족>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좀비 채널 개국 기념으로 원테이크 원컷의 라이브영화가 기획된다. 높은 리스크를 고려해 애드리브가 금지되지만 방송 당일의 온갖 돌발 사건은, 이 좀비 호러를 희대의 임기응변 향연으로 만든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프레임에 보이는 것과 그것이 보이기까지 프레임 밖에서 이루어지는 고역에 관한 애잔한 코미디다. 중년 배우는 알코올 문제가 있고 아이돌 출신 배우는 이미지 유지에 급급하고 촬영감독은 허리가 아프다. 수전증과 설사도 엄습한다. 그러나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를 소동극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숏이 지속되도록 지탱하는 스탭과 배우들의 아슬아슬한 발버둥이다. 물론 최고의 곡예사는 두겹의 영화를 각본, 편집까지 겸해 연출한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이다. 정말이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07/26

가족은 사회의 기본 단위라고 우리는 배운다. 그러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하나부터 열까지 사회가 규정한 가족의 요건에 배치되며 마침내 사회에 의해 해체되는 집단을 가족의 모델로 제시한다. <어느 가족>의 시바타네가 가족으로서 교과서적 정의에 부합하는 점은 경제공동체라는 사실 정도다. 이들의 생계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생산과 소비에 가담하는 것 외에도 좀도둑질에 의존한다.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낮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지만 그 임금으로는 생필품을 댈 수 없어 훔친다. (알량한 일자리들은 안전사고가 났을 때 오사무를 방치하고, 숙련공 노부요를 감원 사태로부터 보호해주지 않는다.) 노인 하츠에(기키 기린)는 기초 의식주 외에 여생에 필요한 ‘무엇’을 다섯명의 객식구를 몰래 들임으로써 채운다. 쇼타(조 가이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구성원을 양성하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이들은 애초에 사회에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고 샛길을 찾아 알아서 살아간다. 성 노동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키(마쓰오카 마유)까지 포함해 동거인 다섯명은 가족이라는 개념이나 호칭을 끌어들이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간다. 시바타네 식구의 위기는, 사회의 인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도래하고 그 계기는 부모에게 학대받는 소녀 유리(사사키 미유)를 거두기로 한 결정이다. 완전히 무력하고 전적인 보호를 요하는 어린 구성원의 합류로 말미암아 다섯 사람은 부지중에 엄마, 오빠, 할머니 등의 전통적 가족의 자리에 준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며 이는 외곽의 삶에 대한 회의적 자문으로 이어진다. 유리의 ‘입양’과 함께 시바타네를 시험에 들게 하는 사건은 하츠에의 죽음이다. 그들은 아이가 생겨도 노인이 죽어도 관청에 알릴 수 없으며 이 지점에서 사회와 충돌한다. 경찰이 들이닥치고 영화의 마지막 장은 행위 대신 많은 말들, 힐문과 대답으로 채워진다. “무슨 목적으로 모여 살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시체를) 유기한 것이 아니라 주운 겁니다. 누군가 버린 것을.” “아이한테는 엄마가 필요하다고요? 엄마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겠죠.” 반박의 목소리를 맡고 있는 인물은 노부요다. 그는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장 명징하게 의식하고 있다. 새어나오는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고 마치 땀인 양 손바닥으로 문질러버리는 안도 사쿠라의 얼굴에는 경멸의 욕지기와 패배감이 공존한다. 민낯으로 연기하는 배우는 드물지 않지만 <어느 가족>의 안도 사쿠라처럼 이목구비 이전에 순수하게 표정만 보이는 연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드높은 심문의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을 표하는 하츠에나 쇼타의 고백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입속말로 처리된다. 좀도둑 가족은 결국 구속과 수용으로 해산하고 유리는 싸늘한 가족에게 돌아간다. 근본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가족 멜로의 형식으로 표현했던 “가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라는 견해를 반복한다. 그러나 <어느 가족>에는 영화의 밀도가 불균질해지더라도 절대 “그렇게 가족이 되었다”로 영화를 마무리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가 느껴진다. 대안가족의 낭만적 미래에 대한 기대는 부서진다. <어느 가족>은 오히려 “그렇게 가족이 되지 못했다”에 가까우며 가족이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영화의 마지막 숏은 시바타네를 가족 비슷한 그룹으로 변화시키고 다시 헤어지게 한 인물 유리에게 주어진다. 소녀는 엄마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무연히 울타리 밖을 내다본다. 유리가 그리워하는 장소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07/30

톰 크루즈는 스스로가 브랜드고 장르이며 카메라 앞에서뿐 아니라 세계 각국 시사회 레드카펫 위를 돌며 흔쾌히 아우라를 발산한다. 즉, 할리우드에 몇 남지 않은 고전적 의미의 스크린 스타다. 특히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대역 없는 스턴트를 감행하는 톰 크루즈는 고전 스크린 스타 중에서도 초기 영화의 위대한 슬랩스틱 배우에 근접한다. 이를테면 그는 코언 형제가 <헤일, 시저!>(2016)에서 예찬한, 특수효과 없는 시대에 스크린에 마법을 불러들었던 명인적 기예를 보유한 스타들의 후예다. 대중은 에단 헌트가 아니라 톰 크루즈가 빌딩과 빌딩 사이를 뛰어넘고 헬기로 헬기를 들이받는 모습을 보러 극장에 간다. 파라마운트는 몇해 전부터 스턴트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개봉 수개월 전부터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이하 <폴아웃>)의 경우, 런던 질주 시퀀스 중 톰 크루즈의 발목이 부러지는 메이킹 필름이 공개됐고 클라이맥스 액션을 위해 크루즈가 2년 동안 헬기 조정 면허를 획득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물론 이른바 리얼 액션은 CG로 지운 와이어와 안전장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아마도 스탭들 역시 내부 기밀 유지 계약에 서명했을 것이므로 실제로 우리가 보는 액션의 얼마가 ‘진짜’인지 확인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빼어난 전문 스턴트맨이 즐비하고 뭐든 디지털 기술로 그려낼 수 있는 시대에 톰 크루즈는 직접 액션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차이와 그것이 객석에 가져다주는 쾌감의 차이를 믿고 실천한다는 점이다. <폴아웃>에는 왜 좀더 간단한 방법으로 작전을 수행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에단 헌트가 “그렇지만 나는 더 나은 방법으로 하고 싶다”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자못 자기반영적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렵게 한다는 점이다. 톰 크루즈는 (정말로) 부러진 발목을 끌고 숏을 마무리짓고, 카메라가 배우와 함께 고공낙하해 오직 감으로 포커스를 맞춘 화면은 덜컹인다. 심지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숱한 장대한 액션 세트피스는 결과적으로는 적을 놓치거나 목표물을 빼앗기는 것으로 끝날 때도 많다. 리얼리즘 액션이 최대 상품성인 영화로서 역설이게도, 이 프랜차이즈의 핵심은 힘겹게 찍는 인위적 과정을 관객이 매 순간 같이 헉헉대며 본다는 데에 있다. 이제 와 돌아보면, <미션 임파서블> 1편(1996)의 랭리 침투 신에서 바닥에 똑 떨어지는 땀 한 방울의 숏은 시리즈 전체의 정수다. (다음에 계속)

<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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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주피터스 문>이 슈퍼히어로 시대의 난민영화라면 <델마>는 슈퍼히어로 시대의 레즈비언 성장 드라마다. 대학 진학으로 엄격한 부모의 집을 처음 떠난 델마(에일리 하보)는 친구 아냐(카야 윌킨스)에게 깊이 끌리면서 섹슈얼리티를 포함한 본인의 정체를 마주한다. 리비도는 어린 시절 봉인된 능력을 깨우고 델마는 그것을 통제해야만 성인으로서 계속 살아나갈 수 있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호수와 수영장을 델마에게 의미심장한 공간으로 연출했다. 실내 수영장은 아냐가 델마에게 처음 말을 건 장소이자 델마가 나중에 죄책감으로 자해를 꾀하는 곳이며 결국은 다시 광장으로 나아가는 수로가 된다. 델마가 수면으로 떠올라 수영장 가장자리를 붙잡을 때마다 영화는 작은 안도에 도달한다. 트리에 감독은 교내 수영장을 가족의 비극이 일어난 고향의 호수와 시각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구구한 대사나 사건없이 델마의 변화를 관객에게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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