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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휩쓸리다
김혜리 2018-07-18

<인크레더블2>

<인크레더블>(2004)에 이어 <인크레더블2>는 슈퍼히어로 활동이 불법인 세계에서 시작한다. 재정난에 처한 히어로 부부 밥과 헬렌에게 재벌 데버 남매가 우호적으로 접근해 슈퍼히어로의 대중 이미지를 개선하는 언론 플레이를 제안한다. <인크레더블2>는 중반까지 묵직하고 흥미로운 명제를 잔뜩 던진다. 어차피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영웅보다 사회의 인프라가 위기를 수습해야 한다는 원칙, 이유 없이 정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관찰이 솔깃하다. 데버 남매는 보도 영상의 앵글과 시점숏의 중요성을 정확히 지적한다. 현실 대신 스크린에 홀린 대중을 비판하는 악당의 일장연설도 논리 정연하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모든 이슈들은 뿌려질 뿐 싹을 틔우지 못하고 고속 액션에 떠내려간다.

06/13

아녜스 바르다의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2000), <아녜스의 해변>(2008),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매우 사적이고 감독 본인이 출연하는 다큐멘터리이면서도 ‘나’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본인의 삶과 일치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여럿 있지만 바르다처럼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예는 드물다. 이는 아녜스 바르다가 낯선 타인에게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고 다가가 마음을 얻는 힘을 가졌기에 가능하다. 일상에서 미와 숭고를 발견하는 눈과 더불어 다큐멘터리스트로서, 극영화 감독으로서 부러워할 만한 천품이다. 다행히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공동 연출한 사진가 JR 역시 비슷한 친화력의 소유자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모델들은 난생처음 만난 작달막한 감독의 염려하는 눈과 장난기 앞에서, 광부였던 아버지의 그을린 빵을 추억하고, 퇴직의 심경을 흔연히 털어놓는다. 그리고 감독은 예술의 재료로 타인의 경험을 착취하지 않는 동시에 취재원이 본인만큼 예술의 재미에 수긍하게 만든다. 일하는 사람들을 피사체로 삼는 영화는 한번도 계급이나 노동운동을 거론하지 않지만 오늘날 여전히 살아 숨쉬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긍지와 연대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드러낸다. 결국 영화로 남지만 작업의 진짜 결과는 최종 프린트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심지어 JR과 바르다가 찍고 설치하는 대형 사진도 보존돼야 할 ‘결과’가 아니다. 노르망디 해변의 방파제 잔해에 붙인 옛 친구 기 부르댕의 어린 시절 모습이 이튿날 파도에 씻겨나갔을 때 바르다는 아쉬워하는 대신 매우 온당한 결말로 받아들인다. 아마도 첫째, 예술은 오래전 바르다가 같은 장소에서 찍고 잊어버렸던 낡은 사진을 찾아내고 확대하고 해변에 앉히는 작업에서 이미 종결됐고 둘째, 사진이 주의 깊게 보존 돼 명소가 되는 쪽보다 죽은 이의 이미지가 잠시 머물렀다 쓸려나간 자리가, 기 부르댕의 사진이 바르다에게 갖는 의미와 어울리는 묘소(墓所)이기 때문일 것이다. 버려진 마을, 허허벌판의 농가, 화학공장의 벽, 컨테이너는 바르다가 가장 사랑하는 공짜 입장 갤러리다. 영화에서 엄숙한 루브르 박물관 전시실을 JR이 미는 휠체어로 가로지르는 바르다의 태도는 권위에 대한 경배와 동떨어져 있다. 라파엘! 베로네제! 그는 거장 화가들을 친구나 들꽃의 이름을 부르듯 경쾌하게 호명한다.

바르다는 <아녜스의 해변>을 가리켜 과거의 사람들을 추억하고 미지의 사람들을 궁금해하고 새로운 만남을 잊지 않기 위한 작업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10년 후 만든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대해서도 감독의 변은 마찬가지다. “나이 들어가면서 내게 가장 열렬해지는 욕망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기억이 망각의 해자(垓子)에 빠지지 않도록하는 것이다.” 자신이 본 것을 시네마를 통해 관객과 나누려는 바르다의 의지는, 노환으로 흐릿해진 본인의 시야를 JR의 도움을 받아 화면에 옮겨놓을 만큼 투철하다. 오래전 바르다는 병으로 생명이 다해가던 동반자 자크 드미의 귀와 머리카락, 손과 같은 신체 세부를 극접사로 촬영했다. 영화는 바르다가 죽음과 소멸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쩌면 시네마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바르다는 사진과 퍼포먼스, 미술만으로도 충일한 아티스트의 삶을 누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에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너무도 쉴 새 없이 영화적으로 아름답다. 예컨대 르아브르 부두 노동자의 세 아내를 그들의 사진을 붙인 고공 컨테이너 안에 앉게 하는 작업 장면을 보면, 거대한 정사진도 압도적이지만, 컨테이너를 쌓는 데에 사용된 크레인들이 현장을 바라보는 JR과 바르다 주변을 돌며 그리는 궤도에 매료되고 만다. 앞서 세 여인을 인터뷰하는 자리도 특별할 것 없는 잔디 언덕이지만 원경에 나타난 화물선 한척이 홀연 구도를 완성한다. 이처럼 계획으로 옭아매진 자국이 전혀 없는 숏들은 프레임 안의 운동과 정지, 그리고 프레임의 움직임과 멈춤으로 감각을 두드린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물 흐르듯 전혀 예측 불가하되 꼬인 데 없는 바르다의 편집이 거시적 리듬을 완성한다. 역시 영화라서 다행이다.

06/18

<로얄 테넌바움>(2001),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2004), <문라이즈 킹덤>(2012)에 이어 이야기의 필요와 무관하게 동물이 죽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까지 보고 나서 나는 인간의 수난을 직접 보여주길 꺼리는 웨스 앤더슨 감독이 개와 고양이를 스크린의 액받이로 쓰고 있는 건 아닐까 넘겨짚었다. 마치 이를 반박하듯 신작 스톱모션애니메이션 <개들의 섬>은 개와 철저히 동일시하는 영화다. 단, 이 영화의 개는 진짜 개라기보다 개의 외양을 한 웨스 앤더슨의 단골 미국 백인 남성상- 목소리 연기를 맡은 빌 머레이, 제프 골드블럼, 에드워드 노튼 등- 에 가깝다. <개들의 섬>의 배경은 실제 일본보다 더 일본적인 일본인데 개들은 렉스, 보스, 듀크 같은 영어 이름으로 불리며 영어로 말한다(비영어권에서는 해당 언어로 자막이 나온다). 여기까진 평범하다. 그런데 일본어 대사에 자막을 달지 않는다는 감독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관객이 직접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극중 인간 캐릭터는 미국인 교환학생 트레이시(그레타 거윅)뿐이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극중 메가사키 시민들을 익명의 군중 이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악역 시장과 주인공 소년도 같은 이유로 전형을 넘어서는 개성을 갖지 못한다. 개성이 지워진 자리는 정교하게 재현된 목판화, 망가, 하이쿠, 스시 같은 일본 문화의 현저한 기호로 빽빽이 채워진다. 어쩌면 <개들의 섬>은 웨스 앤더슨이 꼼꼼히 싼 일본 문화의 ‘벤토’다. <LA타임스>의 저스틴 창이 비판적 평을 쓴 이래 논란이 분분하지만, 자막과 관련한 <개들의 섬>의 특이한 선택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일본인을 타자화하고 일본 문화를 역사적 맥락에서 빼내 미국 X세대 백인 남성의 환상에 맞게 전용했다는 추정이다. 이 혐의는 앤더슨이 <다즐링 주식회사>(2007),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에서 각각 인도와 이탈리아 문화를 편의적으로 그린 전력이 있어 힘을 얻는다. 하긴 <로얄 테넌바움>조차 뉴요커들에게 뉴욕의 패티시라는 불평을 들은 앤더슨이다. 두 번째는, 이 영화의 동일시 대상이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니라 (영어를 쓰는) 개들이고, 감독은 영어 사용 백인을 추방당하고 핍박받는 약자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작금의 불관용적 정치 상황에서 역지사지를 이끌어내려 했다는 해석이다. 내 짐작에 웨스 앤더슨 감독은 두 아이디어 모두 금시초문일 가능성이 높다.

<허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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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고 끌고

<허스토리>의 강점은 인물과 상황의 여건이 실화에 기초한 이야기답게 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미디어는 종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로 규정해왔다. 그러나 플래시백 회상 신이 아예 없는 <허스토리>의 피해자들은 오로지 각자의 사정이 있는 노인이다. 누군가는 배상금이 간절하고 다른 누군가는 위안소 운영에 가담했으며 종군위안부와 굳이 자신을 구분 짓는 근로정신대 피해자도 있다. 흥이 난 할머니들이 공히 기억하는 일본 군가를 합창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가장 입체적이다. 6년에 걸친 관부 재판을 이끈 기업인 문정숙(김희애)의 리더로서 자질은 다양한 사람을 아우르고 투쟁의 방향을 견지하는 포용력과 끈기다. 젊은 직원 선영(이유영)은 발을 밟혀도 사과하는 새가슴이지만 다소곳한 채 물러서지 않는다. 정숙의 친구인 신 사장(김선영)은 상황이 불리하면 발을 빼기도 한다. 그래도 정숙은 원망하지 않고 신 사장도 완전히 등 돌리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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