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마치 코로나19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취약한 이들의 사망 원인 가운데 무척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현재진행형의 위협이다. 단지 미디어가 다루지 않을 뿐이고, 국가가 관심을 거두었을 따름이다. 특정 위협에 대한 사회의 과민한 반응도 과소한 관심도 이들이 어찌 하느냐에 달렸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우리말로는 꽤 이상한 용어에 짓눌려 살았던 지난 몇년. 그동안 우리가 알던 사회라는 건 꽤 많이 파괴됐다. 거리두기를 거두었어도 한번 벌어지기 시작한 거리는 도통 좁혀지지 않는다. 물론 단지 얼마간의 강력한 방역정책 탓만도 아니고 오로지 코로나19가 원흉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던 사회의 해체를 가속화시켰을 따름이다. ‘언택트’라는 더 괴이했던 용어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수시로 ‘접속’하되 여간해선 ‘접촉’하지 않는 우리의 사회적 변형을 꽤 정확히 찌르고 든다는 점일 테다.
세기말의 분위기로 접어들던 1997년, 전도연과 한석규 주연의 <접속>이 개봉했을 때만 해도, 그 둘은 결국 만났다. 그 만남을 가능하게 했던 건 PC통신이었고, 둘 사이의 호감 형성을 사실상 결정지었던 것 역시 물리적으로 접촉하지 않은 상태가 피워 올린 신비감이었지만, 그래도 영화는 실제 공간에서의 어긋남을 이어짐으로 결론 내줬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접속이 접촉을 압도하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연인들의 달달한 로맨스를 사랑하고, 이들의 스쳐감이나 어긋남보다는, 물리적 만남으로 해피 엔딩을 내려주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만나고 연결되지 않는다. 혼인을 말하기 전에 연애 자체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일반적 가정의 형성이나 지배적 성적 지향들 사이의 애정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우정이라고 해도 다를까?
사실 사회라는 건 붉은 피가 흐르는 심장을 지닌 인간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의미의 연결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물리적 상호작용만으로도 이어진다. 애정이나 우정에서, 관계의 형식을 의미하는 애(愛)나 우(友)가 드물고 성글어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관계의 보편적 본질인 정(情)의 에너지가 소멸되고 있는 게 정작 더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대개의 연결에 대해 무정이나 비정에 가까운 ‘냉정’을 유지하는 한편, 짜증과 조롱을 태워 얻은 ‘열정’을 내어 자신의 정의로움을 확인한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그 연결망을 지탱하는 게 오로지 정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다. 그래도 서로를 뭉근히 파고드는 ‘온정’이 사라진 사회는 정말 해피 엔딩을 향해 갈 수 있을까? 종말론도 아니고, 삶이 영화나 소설도 아닌데 ‘엔딩’을 말하는 게 영 껄끄럽다면, 우리의 현재진행 중인 사회적 삶은 그런 온정적 접촉이 없이도 과연 ‘해피’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