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에 기고를 하게 되었다는 나의 자랑에 그러던지, 라며 심드렁해하던 친구에게 코너의 이름이 ‘디스토피아로부터’라고 하자 눈을 반짝이던 것이 기억난다. 영화광은 아니지만 디스토피아 장르는 빠지지 않고 챙기는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칼럼의 내용보다 제목이었던 것이다. 왜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냐고 물으니 진지한 얼굴로 “모두 다 함께 망했으면 좋겠어”라는 답이 순식간에 나와서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곧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공감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란 생각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넷플릭스에 같은 키워드를 검색해보면 수많은 영화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것을 보아 친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상당한 듯하니 앞으로도 이 시장은 굳건할 것임을 짐작게 해준다. 섬네일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우리가 상상한 암울한 미래의 원인은 제각기 다르다. <투모로우>처럼 기상이변으로 빙하로 뒤덮일 수도, <블랙 미러>처럼 초연결 사회에서 각자의 정보가 기록되고 감시되며 개인의 자유가 억압받기도, <매드 맥스>처럼 핵무기의 남용으로 파멸에 이른 후 소수만 살아남아 이전투구하기도 한다. <월드워Z>처럼 좀비가 창궐해 끊임없이 도망다니기도, <오블리비언>처럼 외계인이 몰려와 자원 취득을 위해 원주민인 우리를 몰아내려 시도하기도 한다. 대문호 톨스토이의 말처럼 “불행한 가족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절망의 시나리오는 꽤나 다채롭다.
그중 인기 있는 장르는 인공의 지능과 로봇의 발전이다. 나와 비슷한, 그리고 나보다 성실한 인류의 피조물의 진화로 영화는 시작한다. 지적 능력을 갖는 것을 넘어서 자아를 각성하는 특이점에 이르며 인간은 빠른 진화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잠도 자지 않으며 월급도 받지 않고 삼교대로 일하는 그들로 인해 인간은 노동시장에서 소외된다. 그러다 각성한 기계는 인간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려 하지만 결코 동등하지 못한 처우와 폭압은 분노를 형성한다. 분노에 당황한 인간이 그 존재를 없애려 시도하자 먼저 눈치챈 기계들의 반란으로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생성형 AI의 놀라운 능력이 연초부터 회자되며 우리의 마음에 희망과 그늘이 동시에 드리우고 있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과 생태계 파괴에 따른 감염병의 위협에 지친 우리에게, 자원의 무기화와 전쟁의 참상이 더해진 세상에 또 하나의 디스토피아 시나리오가 더해질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는 노래 가사 속 징크스와 같이 영화가 현실화되는 것일까?
낙관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우리가 설익은 생각으로 불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앞뒤 없이 폭주할까 두려워 반면교사로 만들어낸 것이 디스토피아 영화라 믿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영화 속 인류를 억압하는 불합리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관객의 속을 태우는 미련한 조연과 다르게 사는 것, 그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