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미쳐 있어. 최근까지 헬렌 헌트의 보폭을 돌아보면, 새삼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시트콤의 원제가 떠오른다. 국내에는 <결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던 의 TV시리즈 . 92년 시리즈의 방영이 시작된 이래 헬렌 헌트의 이름에 수식어처럼 따라붙었던 제목이라 귀익은 탓이기도 하지만, 지난 몇년간 그녀에 대한 할리우드의 애정공세가 워낙 유난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오랫동안 개봉작의 대부분은 시나리오로 봤던 영화였다”고 할 만큼 집중포화를 받았다는 헬렌 헌트. 차기작을 고르는 데 2년을 보낸 헌트는, 2000년 가을과 겨울 사이 무려 4편의 영화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10월 중순 미국 극장가에 걸린 <닥터 T와 여인들>을 필두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왓 위민 원트> <캐스트 어웨이>가 모두 그녀의 출연작들. 영화의 완성도나 흥행성적과는 별개로, 섬세하면서도 편안하게 인물에 녹아든 헌트의 연기는 거의 합격점을 받았고, 그중에서도 <왓 위민 원트>는 호평과 함께 제작비의 2배가 넘는 1억5천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이는 성공을 거두며 <이보다…>의 상승세를 뒤이었다.
<왓 위민 원트>는 남성우월주의자에 바람둥이인 닉이 감전사고로 여성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 광고기획사 중견인 닉은 아이디어를 도용하기 위해 유능한 상사 달시에게 접근하지만, 그녀 내면의 진솔한 소리에 귀기울이면서 점점 그녀에게 이끌린다. “헬렌은 현명하고 현대적이면서도 편안한 커리어우먼의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감독 낸시 마이어스는 일찌감치 헌트를 달시로 점찍었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과 알코올에 찌든 웨이트리스 미혼모로 분할 <아름다운…>, 십수년간 무인도에 난파됐다가 되살아온 연인과 비극적으로 재회하는 <캐스트 어웨이>를 앞두고, <결혼 이야기>와 <이보다…>처럼 익숙한 로맨틱 코미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던 헌트는 결국 합류했고, 마지막에 진실을 밝히는 닉을 때리는 것이 달시의 캐릭터에 맞지 않는다며 수정을 제안해 마이어스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헌트가 연기한 달시는 성공한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과 달리, 유능하고 야무지면서도 인간적인 온기와 풍부한 감성을 지닌 인물로 살아났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전문직 여성이건 일상의 무게에 지친 웨이트리스건, 헌트는 공격적인 여전사가 되지 않아도 당당하고, 성적 대상으로서의 섹시함이나 백치미를 과시하지 않아도 매력적이란 점에서 드문 배우란 평을 얻고 있다. 이기적이고 편협하기 짝이 없는 <이보다…>의 로맨스 소설가 멜빈을 다독여주는 식당종업원 캐롤은 자상하되 나약하지 않고,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의 바 웨이트리스 알린은 거칠되 가학적이지 않다. 의사로, 아버지로 남을 돌보는 데 지친 연인이 위로를 바랄 때도 프로골퍼로서 자아성취를 더 중시하는 <닥터 T와 여인들>의 브리는 일견 냉정하지만 독립적인 여성이다. 혹자는 이러한 헌트의 캐릭터야말로 할리우드에서 대안적인 여성성의 정의를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고 평하기도 한다. <왓 위민 원트>의 성공 전후로 헌트는 <아름다운…>의 연기로 평단의 찬사를 받고, 최근작 <캐스트 어웨이>로 연말 연초 흥행 수위를 기록했다. 9살에 시작해 별볼일 없는 TV시리즈를 전전하던 20대의 내리막길도 지나고, 92년부터 7년간 인기리에 순항했던 <결혼 이야기>의 오르막길, 아카데미 수상이라는 하나의 절정도 지나온 연기생활 28년째,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좋아하던 우디 앨런의 영화에 출연중인 헌트, 예정대로라면 로버트 B. 파커의 추리소설로 원하던 감독 데뷔를 하게 될 그녀를 위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한해란 수식어는 아껴둬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