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내 작품을 보며 절대 안 운다. 일이라 생각하고 체크하며 보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만약에 우리>는 볼 때마다 항상 운다. 은호(구교환)가 정원(문가영)을 업고 계단을 오르고, 둘이 함께 돌탑을 쌓으며 소원을 빌고, 행복하게 지내는 순간들도 왠지 마음이 아리다.” 헤어진 연인의 우연한 재회로 시작하는 <만약에 우리>를 보면 문가영 배우의 눈물에 자연히 공감하게 된다. 그가 연기한 정원은 가족 없이 외롭게 자랐으나 은호를 만나 조금씩 변화한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포기했던 건축가의 꿈도 다시 꾸기 시작한다.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20대의 고단함과 천진한 웃음, 30대에 이르러 더 넓은 세상을 품게 된 정원의 얼굴을 배우 문가영만큼 그려낼 이가 또 있을까. 은호와 나눈 행복, 그 관계를 “자의로 포기하며 느꼈을 두려움”(문가영)까지 정원의 삶은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서사가 되어 우리 앞에 당도한다. 정원의 존재로 다시 한번 증명됐다. 배우 문가영의 로맨스는 실패하는 법이 없다.
- <커터> <두 번째 스물> 이후 9년 만의 영화 출연작이다. <만약에 우리>의 출연을 결심한 계기는.
첫째로 이야기가 좋았고, 그동안 꾸준히 로맨스를 해왔기 때문에 장르 면에서도 자신 있었다. 한 인물의 20대, 30대를 함께 펼쳐 보이는 동시에 정원의 감정의 파동이 커서 보여줄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은 작품이었다. 배우로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영화는 계속 하고 싶었다. 그런데 20대 초중반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가 적다보니 맞는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사랑의 이해>가 끝났을 무렵 드라마를 좋게 보신 제작사에서 출연 재안을 주셨다. 내가 가장 먼저 작품에 합류했고 이후 김도영 감독님과 구교환 배우가 들어오면서 퍼즐이 완성된 기분이 들었다.
- 김도영 감독이 배우들이 가져온 인물 해석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문가영 배우가 체화한 정원은 어떤 인물이었나.
정원은 계속 집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그러다 집과 다름없는 은호, 은호의 아버지를 만난 뒤로 안정을 찾는다. 차이가 잘 드러나길 바라서 초반부 정원의 톤을 거칠게 잡았다. 원래 거칠어 보이는 사람일수록 외로움이 크지 않나. 정원은 진한 스모키 메이크업을 한 채 담배를 피우며 등장한다. 잘 보면 몸 곳곳에 타투도 있는데 그동안 시도해보지 않은 컨셉이라 재밌었다. 나이별 말투도 달리했는데 20대 초반일 땐 목소리 톤도 높게 잡고 그 나이대 친구들이 자주 그러는 것처럼 말끝을 정확히 끝맺지 않았다. 그러다 지킬 게 많아지면서 정원은 성숙해진다. <만약에 우리>는 자유도가 높은 현장이었다. 그만큼 내가 채워갈 영역이 넓어 어디까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교환 오빠는 정말 자유롭게 곳곳을 누비더라. (웃음) 보면서 많이 배웠다. 지금까지 한 작품 중 동선, 대사, 표정, 눈빛 모든 면에서 가장 제약 없이 자유롭게 시도한 작품이었다.
- 은호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낀 순간, 반대로 은호의 애정이 식은 순간을 언제 처음 정원이 알아차렸다고 생각하나.
은호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처음부터 알았을 거다. 아마 모든 여성들이 그렇지 않을까. 말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다. 개인적으로 은호의 감정이 식었다고 느낀 장면이 있다. 정원이 은호와 은호 아버지 식당을 가는 신인데 은호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문자를 하며 조금 앞서 걷는다.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은호가 정원의 짐을 들고 먼저 들어간다. 교환 오빠에게도 말하진 않았는데. 그 장면을 찍을 때 서러웠다. 은호의 무관심이 그대로 느껴져서다. 편집됐지만 내가 “은호야, 같이 가”라고 애드리브를 했는데 그 말을 하면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 30대가 되어 재회했을 때 은호는 둘이 헤어진 이유를 되묻거나 만약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본다. 그에 대한 정원의 답변을 들으며 이미 둘의 관계에 관해 더 많은 생각을 해봤을 거라 짐작했다.
나 역시 정원이 훨씬 성숙하고 과거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정리한 입장이라고 봤다. 그래서 이제 와 은호가 말을 꺼내는 게 고통스러운 거다. “네가 선풍기 바람 혼자 쐐 헤어진 거잖아, 치사하게”라는 정원의 대사가 아팠다. 농담처럼 가볍게 던졌지만 말의 무게감이 남다르다.
- 인물의 감정을 세심하게 인지하는 것 같다. 감정선을 미리 상세히 분석하나. 아니면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느껴지는 대로 연기하길 선호하는지.
둘 다이긴 한데 현장에서 자유로우려면 사전에 완벽히 준비해야 한다. 어떤 대사, 표정이 어울릴지 최대한 다양한 예시를 수집하고 촬영 당일의 공간, 상대의 대사, 장면의 분위기 등에 맞춰나간다. 열심히 준비하는데 성격상 티를 내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타고난 재능에 대한 열망과 동경이 있어서다. 예전엔 이런 말도 잘 안 했는데 서른이 되고부턴 질투가 나면 난다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게 됐다.
- 지난해 산문집 <파타(PATA)>를 펴냈다. 배우이자 작가로서 평소 ‘만약에’라는 질문을 많이 던지는 편인가.
그렇다. 과거의 선택이나 일에 관해 ‘그때 그랬다면’ 하며 괴로워하는 성격은 아니고, 일상의 작은 순간이나 글을 쓸 때 주로 ‘만약에’란 질문을 던진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다보니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정말 어렵다.
- 나중에 픽션을 써보고 싶은 마음도 있나.
물론이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데, 어렵다. 소설은 호흡이 더 길고 산문과 달라 자꾸 막힌다. 그래도 조금씩 작업하고 있다.
- 연초 방영한 <그놈은 흑염룡>과 <서초동>, 영화 <만약에 우리>까지 연이어 작품이 공개됐고 9월엔 팬미팅도 진행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2025년을 돌아본다면.
감사할 만큼 꽉 찬 해였다. <만약에 우리>촬영을 마무리한 지 일주일 만에 <그놈은 흑염룡>에 들어갔고, <그놈은 흑염룡>을 끝낸 지 이틀 만에 <서초동>촬영을 시작했다. 일은 너무 재밌는데 체력이 받쳐주질 않아 집에 돌아와 혼자 울곤 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홍보를 시작한 지금, 기분이 너무 좋다. 다이어리에 쓰고 싶을 만큼. 오랜만의 영화이고 촬영 일정과 겹치지 않다보니 온전히 이 기분을 느끼며 관객과 만날 수 있어 그런가보다. 스스로에게 주는 연말 선물은 내 감정을 통제하지 않은 채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 행복하게 한해를 마무리 짓는 요즘, 자주 듣는 곡을 추천해준다면.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마침 오늘이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니까. 정말 좋아해서 연말이 아니라도 가끔씩 꺼내 듣는다. 베트남 촬영 때도 이 음악과 함께했다. 어떤 의미에선 가장 중요한 신들이 남았기 때문에 마인드컨트롤이 필요했다. 대기 시간에 교환 오빠가 노래를 하나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마침 그때 듣던 게 <Merry Christmas Mr. Lawrence>였다. 둘 다 이 노래를 듣고 강가에서 은호와 정원의 감정 신을 촬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