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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오버 더 레인보우
2002-05-14

시사실/ 오버 더 레인보우

■ Story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연인에게 프리지어 꽃다발이라도 전해줄 듯한 모습으로 쳐다보고 있던 진수(이정재)는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해 부분적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자신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대학 동창생들을 찾아다니며 기억의 복구작업에 나선다. 연희(장진영)는 동창이자 연인이었던 상인(정찬)과 헤어진 후유증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수의 노력을 따뜻한 마음으로 돕는다.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확인될 무렵, 진수가 ‘무지개’라고 이름 붙였던 옛 연인을 확인할 수 있는 슬라이드 사진 한컷이 입수된다. ■ Review <오버 더 레인보우>는 사랑이라는 ‘현상’을 잔잔하게 추적하는 정통 멜로드라마다. 만난 지 백일을 기념하는 의식이 젊은 연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은 사랑의 지속성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방증하는 것 같다. 이같은 요즘 세상에(‘요즘 세상’이라니! 이런 구닥다리 표현이 절로 나올 만큼 이 영화가 보여주는 믿음이 고전적이다) 진수는 8년 동안 한결같이 이루지 못할 사랑을 지킨다. 있을지 없을지 모를 ‘무지개 너머’로 가자고 유혹하는 주제가 <오버 더 레인보우>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와 궁합이 맞는다.

사람 사이에 어떻게 사랑이 생겨나고 유지되는지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사랑의 발생 자체는 생화학적 현상이라는 설명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혹은 태어나기 전부터 영혼의 짝들이 무리지어 지상에 내려온다는 좀더 낭만적인 설명도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진수가 우리에게 주는 믿음 역시, 유기체 안의 화학 작용이든 ‘솔 메이트’이든간에 나만의 사랑은 어딘가에 따로 있으며 시간의 시련을 비롯한 어떤 장애물도 통과할 수 있다는 고전적 주제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사랑이 확인되고 난 이후, 그러니까 수십년에 걸쳐 그 사랑이 성공적으로 지속되기 위해 어떤 노력과 태도, 관계의 기술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세심하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19세기 이후에 멜로드라마가 정착한 것은 단혼 소가족 중심의 부르주아적 가정을 편성하기 위해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창조하는 데 몰두하는 이데올로기와 관련있다는 서구의 분석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여전히 신비로운 사랑을 갈망하고 사랑의 화학작용을 경험한다. 이성을 돌파하는 육체의 힘!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멜로드라마와 짝을 이루어 진행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 축은 추억 혹은 기억의 재구성 문제다. 어떤 의미에서 한 인간의 정체성은 기억으로 환원된다. 정체성은 삶의 궤적이고 그 흔적은 기억이라는 형태로 내면에 저장된다. 관계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묵을수록 좋은 것은 술과 친구라는데, 벗은 지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기억과 추억으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으려면 인생의 전환기를 통과해보아야만 한다고 믿는다. 대개의 경우 학창 시절로부터 사회생활로의 진입이 최초의 결정적인 분기점을 이룬다. <오버 더 레인보우>는 이 분기점을 통과해본 사람들, 그러니까 관계의 추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할 수 있는 정도의 연륜(?)을 가진 관객에게는 호소력이 크다. 추억은 사람을 미소짓게 한다.

이런 과정을 유도하는 장치가 주인공의 부분적 기억상실증이며, 그것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여정을 합리화시켜주는 장치는 IMMR(the instinct of momentous memory restoration), 즉 중요한 기억을 복구하려는 무의식의 작용이라는 심리학 용어다. 연희의 직업이 아무도 찾지 않는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 지하철 유실물센터 직원이라는 설정은 좋은 상관성을 이룬다. 당신이 무심결에 흘려버린 것들, 망각 속에 묻혀 먼지가 쌓여 있는 기억의 저장고를 들여다보라. 그 속에서 당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 지금도 여전히 소중한 어떤 것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과거의 여인을 추적하는 가벼운 미스터리 구조와 현재의 연인을 발견해가는 과정 및 양자의 충돌이 드라마의 흥미 중심으로 작용한다.

<오버 더 레인보우>가 거둔 중요한 성과는 장진영이라는 배우의 영토 확장인 것 같다. 그는 <반칙왕>의 맹하고 강단진 모습, <소름>의 강하고 어두운 캐릭터에 이어, 한눈에 쏙 들어오지는 않지만 순수와 여백을 가지고 서서히 사람을 사로잡아가는 멜로 캐릭터를 만족스럽게 소화한다. 안진우 감독이 만든 콘티 북은 브리태니카 백과사전만큼이나 두껍고 치밀했다는데, 숏과 컷의 운용은 전체적으로 익숙하고 소박하다. 모자람도 별로 없고 빼어나게 튀는 점도 드문, 따뜻하고 기본기를 갖춘 멜로드라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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