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파리에서 떨어진 프랑스령 섬, 생 피에르. 만취한 선원 닐(에밀 쿠스투리차)은 동료 루이와의 어리석은 내기 끝에 동네노인 꾸빠르를 살해하게 되고 참수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이 작은 섬엔 단두대도, 사형집행관도 없다. 결국 닐은 대위 쟝(다니엘 오테이유)의 감시 아래 파리에서 단두대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된다. 쟝의 아내인 마담 라(줄리엣 비노쉬)는 닐의 선함을 믿고 그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고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는 주위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대위는 아내를 향한 확고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마을 일을 돕고, 생명을 구하는 등, 닐의 평판이 날로 좋아져가는 가운데 생 피에르 섬으로 단두대를 실은 배가 도착한다.■ Review이상한 일이다. 기품있고 아름다운 아내가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와 점점 가까와지는데도 사형수의 신변을 책임진 남자는 아내를 막지 않는다. 오히려 주위 사람들의 우려와 경고에 맞서 아내의 고결함을 옹호한다. 사형수와 아내는 결국 금지된 사랑에 빠져들지만, 남자는 둘의 도피마저 방조하는 종교적 경지의 희생을 자처한다.
184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실제 살인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길로틴 트래지디>는 겉보기와는 달리 한 남자의 숭고한 믿음과 사랑을 찬양하는 연시가 아니다. 이 영화엔 비극적 로맨스에 응당 기대할 법한 욕망과 질투의 서사가 없다. 비극적 결말을 처음부터 예감한 듯한 남자의 무기력하고 처연한 눈빛이 극의 여백을 채우며, 정작 극의 줄기는 낯설고 위협적인 사형수 닐이 마을 사람들의 친구이자 영웅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이어간다. 닐과 여인의 로맨스, 닐과 마을 사람들의 친교가 잠시 생기를 불어넣는 듯 하지만 결국 닐 역시 홀린 듯 사신(死神)의 호출에 순응한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걸 온더 브릿지>에서 비극적 운명의 예감에 사로잡힌 현대 프랑스인을 그렸던 파트리스 르콩트는, 19세기 중반의 섬으로 바뀐 무대에서도 그 예감에 더욱 강박적으로 탐닉한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단두대의 도착은 하염없이 지연된다. 이 의도되지 않은 지연의 시간이 모든 걸 뒤바꿔놓고 비극적 운명을 잉태한다. 르콩트의 주인공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운명의 전횡을 손벌려 맞이한다.
<길로틴 트래지디>는 자학적 허무주의가 서사의 필연성을 추방한 영화다. 동기의 모호함 자체는 흠이 되지 않더라도, 허무의 심연을 전하기엔 인물묘사가 피상적이며 디테일의 조력이 부족한 편이다. 닐이 자기 머리를 자를 단두대를 운반한다는 아이러니도 다소 억지스럽다. 그래도 세자르 남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오른 명감독 에밀 쿠스투리차의 선한 표정 연기와 베테랑 다니엘 오테이유의 깊고 어두운 눈빛만은 오래 남는다.
백은하 기자 luci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