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고지식한 샐러리맨 철수(전광렬)와 성실하고 억척스런 아내 영희(이미숙), 그리고 네명의 아이들이 사는 18평 아파트의 아침은 이불을 걷어붙이며 일어나라고 소리지르는 영희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평범하지만 의욕이 넘쳐나던 이들의 가정에 남편의 실직과 빚 보증으로 인한 파산 위기가 닥친다. 경매로 넘어갈 지경이 된 집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철수와 영희에게 돈 많은 남녀가 유혹해온다. 자존심과 신의, 아파트를 건질 수 있는 돈 사이에서 두 사람의 갈등은 제각각 깊어진다.
■ Review
청춘스타가 한명도 나오지 않는 <베사메무초> 시사회장에 젊은 관객이 모여 앉아 여기저기서 훌쩍거린다. 영화가 시작된 뒤에도 큰소리로 떠들던 주부의 목소리도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전윤수 감독은 서른을 갓 넘긴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의뭉스런 데뷔작을 가지고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사실 의표는 초반부터 찔렸다. 아내가 이불을 확 들추자 그 아래에서 남편과 네 아이가 뒤엉킨 열개의 다리가 나타나질 않는가. 영화 후반부에서도 남편은 밤늦게 퇴근해서 아이들의 발을 어루만지다가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좀더 큰 발 두개를 보고 사라졌던 아내가 돌아온 것을 알게 된다. 근년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 그것도 한 이불 아래 웅숭그린 다리와 발을 통해 가족의 통합을 묘사한다는 아이디어는 따뜻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베사메무쵸>를 보는 제일 큰 재미는 올망졸망한 아이가 딸린 주부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가족용’을 표방하는 TV드라마에서조차 아이들은 왕자, 공주처럼 꾸며진 채 얼어붙어 있고 주부들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우아한 데 반해, 여기서는 엉덩이를 까고 큰누나에게 들이미는 막내녀석에서부터 소란스런 아이들에게 맞고함을 치며 머리를 쥐어박는 엄마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디테일들이 소시민 가정의 사랑과 행복의 증거들로 차곡차곡 쌓인다.
중산층에 속하는 30대 후반 남녀의 평균적인 인생주기를 보여주는 것도 한국영화에서는 드문 예에 속한다. 월급을 쪼개서 집 장만에 성공하고, 교육보험과 재형저축도 열심히 들고, 형님이 남긴 빚도 다 갚고, 이제는 아이들을 편히 재울 수 있는 조금 넓은 집을 장만하는 게 목표인 영희. 아내와 치르는 수요일 밤의 ‘행사’가 큰아들의 무언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증권사 간부의 ‘작전’ 지시에도 가담하지 않을 정도로 고지식하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힘껏 살고 있는 철수. 이들은 이름 그대로 한국의 평범한 갑남을녀다.
그러니 위기에 빠진 중산층 가정에 대한 묘사가 힘이 있을 수밖에. 알량한 양심 때문에 상부에 미운 털이 박힌 이철수 과장은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 몰래 보증 서준 친구가 돈을 떼먹고 도망간다. “나만 믿으라”고 아내에게 큰소리를 친 그는 동창회에 나가서 속이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작전 정보를 빼내서 거물급 고객을 관리하려 한다. 사력을 다해 발버둥치는 그에게 돈 많은 유한부인이 접근해온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한 남자의 초라함과 침대에 누웠을 때의 모욕감을 표현하는 순간, TV드라마 <허준>에서 상종가를 기록하다가 갑자기 영화로 선회한 전광렬의 야심이 빛을 발한다.
절대 궁지에 몰린 영희의 모습도 자로 잰 듯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이미숙의 연기에 힘입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적금을 모두 해약하면서도 손대지 않았던 교육보험을 깨서 사기꾼에게 넘겨주고 우는 모습, “옛날에 어머니가 낙지를 훔쳐서 날 먹였던 심정을 이해하겠다”며 눈물을 떨구는 장면에서는 관객이 함께 운다. 생존의 위협에 처한 소시민에게 지조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요구인가.
영화가 선택한 공간들 역시 인물들의 소박한 핍진성에 걸맞다. 자동세차장 안에서 차를 닦는 커다란 솔을 보여준다거나 아내가 남편에게 심각한 고백을 하는 장소를 커다랗고 무심한 유리가 달린 냉면집으로 선택한 것 등이 그렇고, 오페라 <나비 부인>의 한 장면을 보여주면서도 <어떤 개인 날> 같은 화려한 아리아를 피해간 것 역시 맥락이 통한다.
이처럼 꼼꼼하고 정직한 묘사 덕분에 영화 <베사메무쵸>는 자본주의 경제의 부도덕성이 얼마나 잔인한 수준인지, 그 덫에 걸린 인간에게 양심과 자존심이란 얼마나 버거운 짐인지를 폭로하는 성실한 리포트가 되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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