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착취당하는 어린 노동자의 기나긴 여정의 공포, <올리버 트위스트>

“죽 한 그릇만 더 주세요.” 찰스 디킨즈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말을 기억하고 또 기다린다. 소년원에서 피죽 한 그릇을 더 얻어먹기 위해 밥그릇을 내미는 올리버 트위스트, 그 소년의 운명적인 모험이 이때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마치 소공녀 세라가 아버지를 여의고 다락방의 어린 하녀로 전락하는 순간이고,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은 작가 쥘 베른이 무인도에 15섯명의 소년들을 한꺼번에 표류시키는 순간이다. 19세기 유럽 문학 속의 소년, 소녀들에게 운명의 격랑은 그때부터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소년, 소녀의 사회학으로서 으뜸가는 것은 역시 <올리버 트위스트>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수없이 많은 소년, 소녀들에게 감동적으로 읽힌 것은 우선 그가 겪는 이야기 자체가 결코 누구도 겪고 싶어하지 않는 불운이었기 때문이다. 부모없이 사는 세상은 얼마나 고달픈가? 평범한 아이들은 올리버의 이야기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그 공포란 부모없는 세상을 살아갈 때 생길 수 있는 만 가지 불우의 가능성을 추체험으로 느끼게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안심한다. 그래도 내게는 부모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올리버도 결국은 행복해지지 않았나, 라고.

그러나 질문이 필요하다. 왜 소년, 소녀였을까? 왜 아이들이었을까?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좀더 심층적인 소년, 소녀의 사회학으로 보이는 이유, 또는 그 공포가 다른 것에 비해 배가 되었던 이유는 주인공 올리버가 단순히 고아 소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일을 해야 하는 고아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19세기 유럽이었다. 산업의 굴레가 인간을 잡아가둔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의 사회적 기원이 아동 노동력의 착취가 만연하던 19세기 유럽 산업사회에 있었다고 말한다 해도 그건 그다지 과장이 되지 않는다. 올리버는 그냥 아이가 아니라 일하는 아이다. 소년원에 처박히는 그 즉시 그에게 맡겨지는 것은 온통 일감이다. 그는 단돈 몇 파운드에 팔아먹을 수 있는 싸구려 인력이고, 장의사집에 가서도 슬픈 척하고 장례의 맨 앞에 서서 표정을 팔아야 하는 인부일 뿐이다. 런던으로 들어와 소매치기 소굴에 합세한 이후에도 그의 역량은 소매치기의 노동력일 뿐이다.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시시각각 그가 일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니 사실 어린 시절 우리가 느꼈던 안도감은 우리는 부모가 있으니 괜찮다가 아니라, 우리는 부모 밑에 있으므로 착취당하며 일을 해도 되지 않는구나였던 것이다. 올리버는 사회의 떠도는 상징적 ‘산업 도구’였고, 착취당하는 어린 노동자였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오직 그를 거둬주는 브라운 로우만이 그에게서 어떤 노동력도 갈취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이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사회를 빗댄 소설에 속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착취당하는 어린 노동자의 기나긴 여정의 공포를 그렸으며, 그를 둘러싼 폭력의 사회를 다룬 작품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전제가 있고 나서야, <올리버 트위스트>의 감독이 로만 폴란스키라는 사실이 비로소 의외가 아닌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가 흥미로운 때는 그가 공포와 폭력의 기운에 손을 댈 때이고, 그 공포와 폭력의 기원이 사회의 어딘가에 집단적으로, 그러나 알아차리기 힘든 음모의 형세로 응집해 있을 때다. <로즈마리 베이비>(한국 제목은 <악마의 씨>)와 <차이나타운>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악마의 씨>의 악마와 그 광신도들(그것은 끝내 실재의 형상으로 나타나 살인광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이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를 살해하는 결말을 낳았다),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 아래 풀리지 않는 범죄적 마성으로 거듭되는 비운의 가족 사회사, 그리고 가장 최근 영화 <피아니스트>의 역사적 죄악의 홀로코스트까지, 그것들은 폭력적이고 공포스러운 인간 사회학의 기원에 그 근거를 맞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폴란스키의 촉수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감지한 것은 그다지 의외는 아닌 셈이다. 실상 원작 자체가 대단히 무섭고 음산한 폭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폴란스키는 원작의 틀을 크게 벗어나 변형적인 형태로 영화를 완성하고자 원했던 것 같지는 않다. 소년원에서 쫓겨난 올리버(버니 클라크)가 장의사집에 인부로 갔다가, 다시 도망쳐 런던의 소매치기 집단으로 흘러들어가고, 거기에서 올리버를 이용하려는 패긴(벤 킹슬리)과 악당 빌 사이크스(제이미 포어만)를 만나고, 다시 그를 구해주는 브라운 로우를 만나는 것으로 영화는 되도록 충실히 소설의 이야기를 축약하고 있다. 사실, 폴란스키는 이렇게 유명한 원작을 영화로 다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처음에 고민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데이비드 린의 1948년작 <올리버 트위스트>, 캐롤 리드의 1968년작 뮤지컬 <올리버!> 이후 이 소설을 소재로 한 그렇다 할 영화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말하자면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는 문학 <올리버 트위스트>를 제대로 옮겨놓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폴란스키는 원작이 갖고 있는 분위기를 대부분 흡수하고자 한다. 음산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는 런던의 야경과 괴물과 사람 그 중간의 형상을 갖춘 반인반마들(특히 벤 킹슬 리가 연기하는 패긴 영감)을 스산한 느낌으로 만들어냈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은 바로 폴란스키의 영화를 곧잘 지배하는 음산함, 그것의 소년·소녀적 버전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폴란스키라는 이름을 앞에 걸고 판단할 때 이 영화를 어떤 야심적인 영화적 성과물로 보기는 힘들다. 폴란스키는 이 영화를 자신의 아이들도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데(단역으로 자신의 아들과 딸을 출연시키기도 했다), 실상 그런 식의 강박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차라리 흥미로운 점은 영화 자체가 아닌 다른 데 있다. 자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고전 명작을 선택할 때조차, 어른들에게 홀로코스트를 환기시키듯 아이들에게 무서움을 심어주는 그런 작품을 폴란스키가 골랐다는 점이다. 제 자식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마저 음산한 폭력의 기원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폴란스키, 그의 그런 영화적 운명이 더 흥미라면 흥미다.

관련영화

2 Comments

  • hulove
    2007-01-10 18:40:11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본 괴물에서의 상징 : 괴물 = 자본주의, 미국 또는 미군, 괴물같은 자본주의, 환경오염. 가족 = 소시민, 항상 당하고만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 강두네 가족 = 현실부적응자, 소외된 존재들, 3류. 현서 = 유일한 희망. 한강 = 삶의 공간, 서울, 대한민국. 남일의 선배 = 국민을 배신한 386. 뼈(인골) = 괴물(자본주의, 국가, 미국)에게 살과 피(고혈)를 다 빨아 먹힌 우리들. 데모대 = 21세기 데모대. 에이젼트엘로우 =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시키기 위한 미국 혹은 다국적 기업의 도구, 지극히 미국적이고 자본적인 도구, 베트남전의 고엽제?, 슈퍼 박테리아의 내성을 더 키워주는 항생제. 남일의 화염병 = 80년대의 무기, 정밀하지 못한 분노의 무기. 남주의 화살 = 느리지만 정확한 타격, 괴물의 눈알(자본주의의, 혹은 미국의 심장부)을 꿰뜷은 무기,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1. 강두의 큰 쇠파이프 = 쇠파이프, 민중의 힘,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2. 괴물의 죽음 = 자본주의, 미국의 종말(까지는 아니겠지만). 현서의 죽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나지 않는 희생. 엔딩 = 가족의 복원,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을 원하는 우리들의 소망.
    신고
  • koreamed
    2006-08-24 17:45:04
    한강에 괴물이 출현했다. 그 괴물은 백주대낮에 나타나 한강변의 시민들을 공격하고 죽이고 잡아먹고 납치해 간다. 그 괴물은 미군 영안실에서 한강으로 통하는 하수구에 무단 방류한 포름알데히드에 의해 돌연변이를 일으켜 기형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중생물체이다. 그 괴물은 어느 날 우연히 한강다리에서 떨어진 남자를 받아먹고 인육에 탐닉하게 된다.



    사건이 발생하자 당국은 한강을 통제하고 괴물과 접촉한 사람들을 격리시킨다. 사건의 국면은 괴물이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괴바이러스에 집중한다. 당국은 한강변 주변을 방역한다. 괴물 사건이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국면으로 고정되는 것은 미국(미군)이 주도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괴물퇴치를 명분으로 에이전트 옐로우를 살포할 것을 결정하고 시민단체는 이에 반발하여 시위를 벌인다. 대한민국 정부가 괴물문제에 관하여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멘트는 없다.

    이 영화를 만든 당년 38세의 봉준호 감독은 이십년 전이던 고3 때 우연히 잠실대교의 교각을 기어오르던 괴생물체를 목격하고, 장차 영화감독이 된다면 반드시 이것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에 미군이 한강에 독극물 포름알데히드를 무단 방류한 맥팔렌드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이야말로 자신이 고교시절부터 꿈꿔온 괴물영화를 만들 절묘한 소재라고 판단하고 사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출발은 무엇보다도 ‘한강의 괴물’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괴물의 태생이나 한강의 폭, 깊이, 은신처 같은 요소들을 고려한다면 한강의 괴물은 고질라나 킹콩 같은 크기일 수는 없다. 그래서 괴물은 도롱뇽 같은 양서류로 설정하고 괴물의 행각은 한강과 한강변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요소들을 고려하고 나서 명색이 괴물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최대한의 크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괴물은 어떤 조건과 원인에 의한 돌연변이 생명체이지 에이리언 같이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생명체는 아니다. 괴물의 태생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고질라」나 「엘리게이더」와 비슷하지 「아웃 브레이크」나 「에이리언」과는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괴물적인 요소로서는 크게 어필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아니면 감독 자신이 괴물을 내세우고 있지만 애초에 괴물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여 괴물은 실제보다는 은유와 상징으로 더 기능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괴물이 차지하는 부분을 드러내더라도 충분히 영화로서 가능하다고 했던 한 출연배우의 발언은 아주 의미심장한 언급이다.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박강두(박희봉) 가족에게 괴물이란 그들의 삶을 압박해 들어오는 사회현실이다. 감독은 괴물이란 상징을 통해 사회나 국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황량한 벌판에 외따로 서서 삶이란 버거운 현실과 맞서고 있는 한 가족의 사투를 보여 준다. 가족의 막내인 현서가 처한 현실은 지극히 운명적이고, 괴물의 출현에 있어 대한민국이란 국가권력은 한 걸음 물러나 있고 그 자리는 미국이 대신 차지하고 있다. 마치 한강의 관할권이 미국에 있는 듯하다.



    공원으로 복원하기 전의 여의도광장을 생각해 보자. 예전에 그런 사건이 있었다. 한 남자가 자동차를 몰고 광장을 미친 듯이 질주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했었다. 그걸 기억하면서 한 상황을 상정해보자.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어떤 사람이 군용 장갑차를 몰고 여의도 광장에 나타났다. 주변 기물들을 마구 부수고 차량들과 충돌하고 사람들은 바퀴에 깔린다. 사람들은 장갑차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오로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뿐이다. 괴물이 한강 둔치에 출현한 사건은 이와 같다.



    이것은 오로지 물리적인 사태이지 생화학적인 사건은 아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접한 당국은 엉뚱하게도 괴생물체가 지닌 바이러스에 집중한다. 죽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어떤 감염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영화의 진행이 이렇게 엇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영화가 지닌 상징이며 권력에 대한 냉소의 자세인지는 모른다. 하여튼 영화는 이 부분에서 심하게 굴절되어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종종 바다에서 고래가 어선의 그물에 걸려 죽는다. 당국이 괴물을 막거나 잡을 생각이었다면 한강에 그물을 치거나 거대한 그물을 장착한 헬리콥터 편대를 띄웠어야 한다. TV에선 최일구 앵커가 열심히 떠들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당국과 미국은 괴물을 잡을 생각이 없다. 한강변은 세상과 격리되어 있다.



    당국은 방역차를 동원했다. 방역차에서 내뿜는 하얀 연기는 절대로 감염원인 바이러스를 죽이지 못한다. 연기의 실체는 살충제를 머금은 경유방울이다. 이 경유방울은 모기나 파리조차도 죽이지 못한다고 류시원이 MC 보던 호기심천국에서 이미 증명한 바 있다. 밤섬을 배경으로 몇 대의 보트에서 방역연기를 내뿜는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이 장면이「친구」에 대한 오마주 혹은 냉소가 아니라면 바이러스가 한강을 넘어 사회의 곳곳으로 안개처럼 퍼진다는 상징인지도 모른다.



    당국과 미국은 새로운 방역체계를 시험할 궁리만 한다. 괴물은 그럴싸한 구실이고 좋은 명분이 된다. 하지만 바이러스도 없는데 미국은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할 작업을 왜 하려는 것일까? 미국은 괴물의 출현이 자신들의 탓이며 이에 개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작정한 것인가? 그렇다면 괴물이란 미국의 또 다른 상징인가?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