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누군가로 변하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신성한 마지막 순간 이렇게 말하리라. 그것은 복수였다고.” 남자로 변장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다음, 혼돈스런 격정으로 출렁대는 삶을 살다 요절한 이자벨 에버하트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티나 브랜든에게 남장은 앙갚음도 시위도, 울혈진 그 무엇도 아니다. 브랜든이 남자로 행세하는 동기는 투명하고 천연스럽다. 좋아서, 편안해서, 즐거워서, 사내의 차림새로 거울을 볼 때 자신이 덜 낯설어 보여서다. 그래서 애인 라나에게 ‘양성’임을 고백하는 순간 브랜든은 변명한다. “사실보다 훨씬 복잡하게 들릴 거야.”
그러나 누구도 해칠 의사가 없는 정직한 몸짓이 경천동지할 위협으로 둔갑하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브랜든은 기어코 박멸돼야 할 역병이 되어 가혹한 징벌을 받는다. 백인여성과 사귀었다는 이유로 40년 전 피살된 버지니아의 흑인 청년 에멧 틸처럼. 그러나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진 1993년 실화를 극 영화로 만든 초년병 감독 킴벌리 피어스는 슬기롭게도 사건의 센세이션과 주제의 공격성에 얼굴을 파묻지 않는다. 그는 남장여자쯤 되는 특이한 캐릭터에 성격이 뭐 더 필요하냐고 게으름을 피우는 대신, 티나 브랜든이라는 유일무이한 개인의 체취를 관객의 코 끝에 되살려낸다.
가슴을 붕대로 처매고 보슬보슬 깎은 머리에 카우보이 모자를 걸친 브랜든은 생(生) 의지로 매순간 약동하며 우리를 매료한다. 그는 결코 영악한 편이 못 되나, 어떤 궁지에서도 징징대지 않는 단단하고 ‘쿨’한 젊은이다. 바라보기 몹시 고역스런 강간장면에서조차 브랜든은 누구의 동정도 구하지 않고 찢기고 멍든 가녀린 육신을 묵묵히 추스른다. 다 네가 자초한 일이라는 가해자들의 궤변에 소녀는 바삭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한다. “알아, 다 내 잘못이야.” 세상과 자신 사이에 어떤 이물질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이 단도직입적인 영혼을 표현한 힐라리 스왱크의 연기는 너무 자연스러워 거의 연기 같지도 않다.
타인의 마음을 살피고 배려하는 동시에 필요하면 용기를 발휘하는 브랜든은, 무식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운 나쁘면 둘 다인 이 영화 속의 ‘진짜’ 남자들에 비해 꿈의 연인이다. 한편 브랜든과 라나의 섹스장면은 여성의 감관에 촉감된 관능미, 옷을 벗기는 행위보다 입혀주는 행위에 깃들어 있는 따스한 에로티시즘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남자 친구가 여자임을 알고도 애정을 거두지 않는 라나의 태도가 그리 이상하지 않다. 감옥에 갇힌 브랜든이 성별의 비밀을 털어놓자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야. 네가 뭐든 여기서 널 꺼낼 거야”라고 라나가 잘라 말하는 대목은, 어느 멜로드라마 못지 않게 로맨틱하다. 그들은 집안끼리 원수라서, 나이 차가 많아서 맺어지지 못하는 연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비련의 커플이다. 규칙 따위 아랑곳없이 원하는 제 몫의 삶을 요구하는 두 여자의 존재는, 자기 세계가 너무 박약해 그 한 귀퉁이의 흔들림도 견디지 못하는 남자들을 겁주어 폭력으로 몰아간다.
<소년은…>은 노동 계급 젊은이들의 청춘 영화이기도 하다. 미 대륙의 황량한 심장부를 배경으로 한 테렌스 맬릭의 <황무지>가 그랬듯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가없이 펼쳐진 미국 중부의 풍광과 포박 감금된 인간의 정신을 포개놓는다. 아버지는 멤피스에 어머니는 할리우드에 있다고 거짓말하는 브랜든은, 탈주를 꿈꾸는 동시에 어디선가 상냥히 맞아 들여지기를 갈망한다. 흙먼지 이는 도로를 내처 달리는 <황무지>의 연쇄 살인범 커플과 달리, 정체성과 가족, 사랑을 찾는 브랜든의 여정은 내면을 맴돈다.
이름이 맘에 안 들어 바꾸고 싶다는 친구 캔디스에게 브랜든은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라고 답한다. <소년은…>이 이야기하는 아이덴티티 문제는 성적 취향의 영역을 넘어선다. 엄밀히 말해 브랜든은 레즈비언으로서가 아니라 ‘남자’로서 라나를 사랑했고 라나도 여자로서 남자인 브랜든에게 매혹된다. 감독은 레즈비언이나 ‘성 정체성’이란 말을 내세우지 않으며 드라마를 몰아간다. 후반부 취조실장면에 이르러서야 ‘성 정체성 위기’라는 단어가 아주 어색하게 브랜든의 입 밖에 나오지만 그것은 선언이 아니라, 자신의 고달픈 혼돈에 무엇이 됐건 이름을 지어 받고 싶은 피로의 표현에 가깝다. <소년은…>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우리 모두의 인간성은 미스터리이며 우리에겐 그 미로를 탐사할 기회와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묻지 않는 만연된 나태 앞에 <소년은…>은 새파란 불꽃을 피워 올린다. 빛과 열기를 사방에 흩뿌리던 젊음과 그것의 처참한 파괴를 한달음에 뒤쫓는 이 영화는 한바탕 격렬한 드라이브와 같다. 눈부신 빛이 사그라들다 마침내 무심한 바람결에 꺼지는 광경은 언제나 슬프다. 그러나 어떤 빛은 너무 찬란해 오랜 잔상을 어둠 위에 새긴다.
배우 힐라리 스왱크
남성에서 여성까지, 종횡무진
<여왕 크리스티나>의 그레타 가르보, <실비아 스칼렛>의 캐서린 헵번, <모로코>의 마를렌 디트리히, <스위치>의 엘렌 바킨. 대대로 남장 여자 연기는 재능있는 여성 스타의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했으나 영화 내적으로는 희화화되거나 도리어 여성미를 부각시키는 용도로 이용되는 예가 잦았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은…>에서 힐라리 스왱크(26)가 보여준 조금의 난센스도 용납않는 자연주의적 남장 연기는 <올란도>의 틸다 스윈튼 연기와 더불어 쉽게 잊히지 않을 듯하다.
<뱀파이어 사냥꾼 버피>의 조연으로 잘 알려진 스왱크는 9살에 연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인생 첫 배역은 역시 남성 캐릭터인 <정글 북>의 모글리. 학교 연극에 몰두하던 그는 1990년 영화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벨링햄을 떠나 LA로 이주했다. 스왱크는 <그로잉 페인즈> <캠프 와일더> 등 TV 시리즈를 거쳐 1992년 <뱀파이어 사냥꾼 버피>의 킴벌리 역으로 주가를 높였고 1994년 <넥스트 가라데 키드>의 주연으로 발탁됐다. 이후 <베벌리 힐스 90210> <하트우드> 등 영화와 방송에서 계속된 그녀의 꾸준한 활동은, 미국 비평가협회, 골든글로브, 뉴욕과 LA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을 휩쓸고 오스카만 기다리고 있는 <소년은…>의 브랜든 역으로 극진히 보상받는 중. <소년…>에서 약 4주간 완전한 남성으로 생활한 스왱크는 촬영 뒤 다시 여성으로 돌아오는 데에 곤란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무술과 스카이 다이빙, 래프팅을 즐기는 스왱크는 1997년 <멜로즈 플레이스>의 배우 처드 로와 결혼해 LA에 살고 있다. 이제 격이 다른 스타가 된 스왱크의 차기작은 샘 레이미의 <기프트>와 시대극 <목걸이 사건>. 18세기 프랑스 여인으로 변신할 <목걸이 사건>에서 스왱크는 마리 앙투아네트 몰락의 씨앗이 된 ‘목걸이 스캔들’을 일으킨 여성 잔 드 라모트-발루아 역을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