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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흔드는 무기력한 아버지의 초상,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종도 2005-03-08

1. 당신을 마침내 울리고 말 위대한 멜로 2. 그러나 가슴 베이지 않게 조심할 것 3. 록키도 아니며 성난 황소는 더욱 아님.

아버지보다 불편한 존재는 없다. 영화로 담아내기엔 아버지는 코끼리처럼 너무 크고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따뜻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헛된 소망은 버리는 게 좋다. 스크린에서 아버지들은 상투적으로 둘 중 하나인데, 권력을 전횡하거나 무기력하다. 그들이 살해되거나 쫓겨나는 이유는 분명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스크린에서 부성의 목소리를 복원시키는 희귀한 감독이다. <퍼펙트 월드>에서 납치된 아이 버즈는 탈옥수 케빈 코스트너에게 잃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힐러리 스왱크(매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프랭키 던)에게서 그림자처럼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아버지를 발견한다. ‘클린트 월드’는 아버지가 만들어가는 세계다. 플롯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서 있다. <스페이스 카우보이>는 양로원에 있어야 할 아버지 비행사들이 MIT 출신의 오만방자한 젊은 아들들을 가르치는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딸에게 대하는 태도를 본 뒤에 관객은 사형수가 범인이 아님을 알아차리며(<트루 크라임>), 숀 펜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 관객은 격분하면서도(<미스틱 리버>) 그가 딸을 치한에게 잃어버렸음을 참작해 가벼운 형량을 내리게 된다.

<밀리언…>의 각본을 맡은 폴 해기스는 할리우드에서 걸작을 만드는 비결을, 좋은 원고를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준 다음에 뒤로 빠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목은 닭 볏처럼 주름으로 가득하고, 벌써 영화감독의 만신전에 올라가서 쉬셔야 할 만 74살의 노인이지만 이스트우드는 현역으로 57번째 출연, 27번째 연출, 10번째 작곡을 맡아 <밀리언…>을 세상에 내보냈다. <밀리언…>은 왜 그의 영화가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지 말해주는 시금석 같은 작품이다. 여전히 아버지가 나오지만, 그는 늘 그렇듯 아버지의 이야기를 솜씨있게 장르적으로 풀어서 들려준다. 아버지는 코끼리가 아니라 사려 깊은 보안관이자 카우보이로 나와서 세상의 상처와 결함을 찾아나선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무법과 불의는 어디나 있게 마련이고, 이를 참지 못하고 찾아나서는 이는 또 어디나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 이 고지식하며 멋있는 보수주의자의 견해다. 그는 <밀리언…>에서 예이츠의 시집을 왼손에, 화덕에서 갓 구운 따뜻한 레몬 파이를 오른 손에 들고 혈육을 찾아나선다. 그가 만들려고 하는 제대로 된 세상은 저녁이면 혈육이 함께 모여 레몬 파이를 먹고 예이츠의 시를 읽는 세상이다.

<밀리언…>은 이제껏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고자 하는 영화적 노력들이 실은, 혈육이 함께 밥상에 앉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림에서 더운 부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이미지는 마음의 모세관을 뚫고 스며들어온다. 아버지를 그리려는 붓의 터치는 이전보다 더 두텁고 세밀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힐러리 스왱크, 그리고 모건 프리먼과 함께 두 시간 대화를 나누다 극장 밖을 나서는 기분이 들 정도로 그림엔 입체감이 살아 있다.

<밀리언…>은 복싱영화지만 한편으로 복싱영화가 아니다. 부엌에서 가족끼리 나누는 한끼 식사를 위해 피흘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퇴물 복서 출신 스크랩(모건 프리먼)과 함께 변두리 허름한 힛 핏 체육관을 꾸려가는 컷맨(링 위에 오르는 코너맨 중 하나로 권투선수의 상처를 응급처치하고 지혈을 맡는다) 출신의 관장 프랭키 던은 걱정거리가 많은 사람이다. 스크랩이 괜찮은 세제를 사면 돈 아끼라는 잔소리나 하고, 유망한 복서에게는 아직 기다려봐야 한다며 타이틀전을 미룬다. 아일랜드의 고어인 게일어 배우는 게 낙이고, 젊은 신부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는 재미로 성당에 가며, 딸을 만나고 싶어하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 해 저물 무렵 후미진 골목 같은 이곳에, 나이 서른둘의 웨이트리스 매기가 권투를 배우겠다며 찾아온다. 매기는 권투에 모든 것을 걸고 덤비며, 새벽이고 밤이고 텅 빈 체육관에서 주먹을 날리지만 프랭키가 보기에 여자가 권투를 한다는 일처럼 허섭스러운 건 없다.

마치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젊은 건맨 하나만 교체한 듯한 이들 마음 잘 맞는 삼인조는 험한 세파를 용케 뚫고 나가는데, 그 과정 자체가 마음을 훈훈하게 만든다. 제대로 된 마지막 시합을 마치고 물러나고 싶은 스크랩, 밑바닥 삶에서 복서로 우뚝 일어서고 싶은 매기, 딸과 화해하고 싶은 프랭키의 소망은 그러나 위태롭게 전진한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과 함께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는 ‘클린트 월드’에 마음을 열게 된다. 거기에선 아버지와 자식들이 고통을 함께 나눈 뒤 진정한 화해를 하리라는 희망을 얻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마지막 내리는 냉정하고 완고한 판단이 설령 그릇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깊은 연민의 우물에서 길어올린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클린트 월드’의 아버지들은 사실,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아버지가 되기엔 결함 많은 인간들이다. 그들에겐 짙은 그늘과 좌절과 상처가 있다. 이런 그늘과 그림자 덕분에 오히려 아버지의 초상은 마음을 흔든다. 매기와 프랭키가 ‘모쿠슈라’라는 말로 맺어지고, 그 말의 뜻이 마지막까지 강한 궁금증으로 남아 호기심을 자극한다. 사소한 플롯과 소품까지 모두 영화의 주제를 향해 복무할 뿐 아니라 영화를 다시 복기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이런 작품을 우리는 걸작이라고 부른다.

원작 소설집<불타는 로프>의 작가 제리 보이드

69세 데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인생살이

원작의 힘이 그토록 강하지 않았다면 <밀리언…>의 힘도 그만큼 약했을 것이다. 1999년 한 출판 관계자가 작은 잡지에 실린 제리 보이드의 단편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소설도, 영화도 없었을 것이다. 그 작품은 20년 동안 링 위에서 컷맨 노릇을 한 제리 보이드(필명은 F. X. 툴)의 경험이 배어 있는 이야기였다. 제리 보이드는 택시 운전사, 트럭 운전사, 청소부, 바텐더 등 밑바닥 삶을 전전했고 멕시코에선 투우사를 하며 세번이나 피를 흘리기도 했다. 정식 문학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줄기차게 40년간 글을 썼다. 처음 글이 팔린 것은 컷맨의 복수담을 그린 단편소설로 샌프란시스코의 문학잡지에 실렸다. 글을 써서 처음 번 50달러를 초콜릿과 몰트 위스키 한잔으로 자축한 나이는 69살 때였다.

이듬해 에코 출판사는 무명의 작가가 낸 단편집 <불타는 로프: 링 위의 이야기>를 무려 5만부나 찍기로 했다. 생생한 현장의 경험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LA 컨피덴셜>을 쓴 제임스 얼로이는 “권투에 관해 쓰여진 지금까지 최고의 책”이라 호평했고 조이스 캐롤 오츠 같은 작가는 “링의 언어를 말할 줄 아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며 미지의 신인 작가를 주목했다. 평론가들은 아일랜드 출신인 보이드의 문체를 아일랜드 출신 작가 프랭크 매코트에 비유했다. <불타는 로프…>는 다섯편의 단편과 한편의 중편을 담았는데 <밀리언…>은 그 가운데 한편이다. 각본가 폴 해기스는 다른 두편을 잘 뒤섞어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를 풀었다. <불타는 로프…> 출판 이후 보이드는 텍사스-멕시코 국경 지대를 배경으로 한 첫 장편소설을 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2년 뒤 소설을 미처 다 마치지 못하고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서 심장수술 뒤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불타는 로프…>를 자신의 오랜 파트너였던 복싱 트레이너 더브 헌틀리에게 헌정했다. 남가주대학은 얼마 전 제리 보이드와 폴 해기스에게 극작가상을 안겼다. 보이드의 딸 에린은, 번번이 원고를 거절당하고 두번 결혼에 실패한 아버지를 회상하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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