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옛날 옛적에. 스크린 가득 펼쳐진 동화책이 한장씩 넘어간다. 부욱! 갑자기 커다란 초록색 손이 책을 찢어내더니 화장실 뒤처리에 써버린다. 성 밖 늪지대에 사는 거인 슈렉의 짓이다. 독재자 파콰드에게 쫓긴 동화 속 주인공들이 떼지어 몰려오는 바람에 고요한 안식처를 잃게 된 슈렉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피오나를 데려다 파콰드와 짝지어주고 숲을 되찾기로 계약을 맺는다. 엽기발랄한 괴물 슈렉과 수다스러운 당나귀 덩키가 모험담을 펼친 끝에 찾아낸 피오나는 슈렉을 보자마자 빨리 키스하라고 입술을 쑥 내미는 골때리는 공주다. 개구리와 뱀으로 풍선을 불어가며 성으로 돌아오는 동안 슈렉과 피오나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
■ Review
아이들의 환호성과 함께 시작된 시사회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박장대소하며 막을 내렸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이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이 화면 밖으로 걸어나와 붉은 카펫을 밟을 수만 있었더라면 심사위원단이 남녀 주연상 가운데 하나쯤은 주었을지도 모른다.<이집트의 왕자> <개미> <엘도라도> 등으로 디즈니와 경쟁을 벌였던 드림웍스는 <슈렉>을 가지고 회심의 한판승을 거두었다. 프로듀서인 제프리 카젠버그는 디즈니에 몸담고 있던 시절 <인어공주> <알라딘> <라이온 킹> 등 디즈니 중흥의 기폭제가 된 흥행 대박 애니메이션을 잇따라 내놓았던 주역이다. 그는 <슈렉>을 보러온 관객의 머리 속에 어떤 영화 텍스트들이 입력되어 있으며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슈렉>의 전략은 바로 그 텍스트와 기대를 패러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디즈니영화를 문화이론적으로 연구한다면 전세계의 온갖 전래동화들을 디즈니식 이데올로기와 스타일로 전유하여- ‘Disneyfication’-
현대 관객의 추억을 재구성한다는 데서 첫 번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함과 깨끗함, 아름다움 등을 기치로 내세우는 디즈니의 성채
속에 끌려들어가 미국 백인 중산층의 환상에 봉사했던 온갖 동화 속 주인공들, 이를테면 신데렐라, 빨간 머리, 백설공주, 피노키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로빈 후드,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미녀와 야수, 행복의 파랑새, 심지어 천막 안으로 엉덩이를 들여놓으려 하는 뻔뻔스런 당나귀가
<슈렉> 속에 재등장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바꾼다.
이들 주인공들은 디즈니영화 속에서보다 일제히 계층을 하강했으며 좀더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이다. 따라서 음악 역시 디즈니가 전통적으로 선호해온 세미 클래식이나 아름다운 멜로디의 발라드 대신 스매시 마우스, 일스(‘뱀장어들’이라니!), 프로클레이머스 등 다양한 젊은 밴드들의 록음악을 주로 사용했다.
지역성이나 시대감각 역시 다양한 문화적 취향에 맞출 수 있도록 혼종적인 시공간을 택했다. 이를테면 독재자 파콰드가 사는 성은 현대식 고층건물의 높이와 윤곽, 유럽 중세 성채의 외관,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단순하고 육중한 대리석 질감 등을 뒤섞어놓았다. 피오나가 갇혀 있던 성은 <인디아나 존스>와 <쥬라기 공원>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염두에 둔 것 같고, 파콰드의 놀이동산인 둘락은 순진하고 즐거운 것만이 있는 세상이라고 가정하는 디즈니식의 놀이동산문화에 대한 조롱을 내포한다.
피오나 역시 우아하고 내숭떠는 공주가 아니라 <매트릭스>의 발차기를 구사할 만큼 생기발랄하면서도 내면은 겁많고 순진한 현대의 십대 소녀를 염두에 두고 구성된 캐릭터이며, 괴물과 당나귀는 집단성을 거부하고 고립된 삶을 사는 반항아와 낙관적인 떠벌이라는 버디무비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광범위한 텍스트를 인용하고 패러디한 <슈렉>은 할리우드가 생산해낸 대중오락영화의 하이퍼텍스트라 할 만하다.
“표정이 예술”이라는 관객의 찬사처럼 <슈렉>은 빛 반사까지 감안된 피부와 근육의 움직임, 눈동자의 표현력, 찰랑이는 머리카락, 흩날리는 천의 느낌 등 최첨단의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낸 3D이미지의 사실감을 과시하면서도, 실제 인간과 꼭 닮았다고 강조하는 <파이널 판타지>와 달리 테크놀로지의 가능성과 한계 안에서 적절하게 타협했다.
피오나의 비밀이 밝혀지고 슈렉이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을 담아 키스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은 디즈니의 여성관에 대한 유쾌한 뒤집기로서, 아름다움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정의를 수용했다는 평을 들을 만도 하다. 새로운 스타일과 문화적 취향뿐만 아니라 이처럼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마저 주류 안에 흡수하는 능력이야말로 할리우드가 끝없이 번성하는 중요한 비결일 것이다.
<슈렉>의 20자평에 별점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아도 심오한 예술영화 지상주의자나 상업적 오락영화 애호가 양쪽으로부터 달걀 날아오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사랑스러운 요정과 용감한 왕자이야기를 최고로 치는 디즈니 중독자들을 제외하고.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슈렉> 제작 과정 3D, 아직은 극영화의
보호막 아래
<슈렉>은 제작과정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지난해와 올해 <아메리칸 뷰티>와 <글래디에이터>로아카데미 작품상을 연속 수상하여 권위있는 메이저의 자리를 굳힌 드림웍스는 ‘애니메이션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슈렉>의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발굴하기 위해 1년이 넘도록 스토리 작업에 매달렸다. 애니메이션의 칸 진출이라는 화제까지 겹쳐 개봉 첫 주말의 흥행성적이 4200만달러에 달해
디즈니의 최고 흥행작인 <라이온 킹>의 초반 기록을 깼다.
최근 할리우드애니메이션은 주요 캐릭터에 A급 스타의 목소리를 쓰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가고 있는데, <슈렉> 역시 마이크 마이어스,
카메론 디아즈, 에디 머피 등을 기용했다. 끝없는 수다를 쏟아내는 에디 머피의 입모양과 피부색에 바탕을 둔 당나귀 덩키의 캐릭터를 보면 목소리
캐스팅을 먼저 하고 나서 캐릭터를 구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실제 배우의 관계는 오늘날 3D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시사해준다. 100% 컴퓨터그래픽스로 제작된
<토이 스토리>가 나온 이래 지난 5년 동안 의미있는 기술적 진보와 노하우가 계속 축적되었고, 덕분에 최근에 나온 3D애니메이션들은
인간의 모습을 똑같이 표현할 수 있는 기술력을 과시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조만간 컴퓨터 기술이 전통적인 영화를, 가상의 캐릭터가 살아
있는 배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냐는 호기심어린 진단도 나온다. 그러나 3D애니메이션이 전통적인 실사영화의 플롯구축 방법과 재현양식, 제작과
배급체계는 물론이고 극영화의 스타 시스템에까지 기대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기간 동안 영화의 보호막 아래 컴퓨터그래픽스 기술이 성장하는 국면이
계속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