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복학을 앞둔 대학생 지석(조인성)은 소설가를 지망하는 국문학도. 어느 날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간 지석은, 헤어 디자이너가 된 중학교 동창 희진(신민아)을 만난다. 독서를 좋아하며 매사에 신중한 지석과 달리,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희진은 발랄하고 즉흥적인 성격. 우연히 재회한 둘은 환경도 성격도 다른 서로에게 끌리고, 희진은 한달간의 계약연애를 제안한다. 지석을 따라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나서고, 희진을 따라 포트리스 게임을 배워가며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 하지만 지석은 중학교 시절 첫사랑이었던 성혜(박정아)를 만나면서 마음이 흔들린다. 밴드의 보컬로 멋지게 변신한 성혜에게 질투를 느낀 희진은 지석과 다투고, 뜻밖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고민에 빠진다.
■ Review
“난 산책하듯 삶의 순간순간을 100% 느끼면서 살고 싶어.” “그래 난 100m 달리기를 하듯 살고 싶은데.” 바닷가에 나란히 앉은 채 산책과 100m 달리기의 차이만큼 다른 삶의 자세를 드러내는 지석과 희진. <마들렌>은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 20대 남녀의 만남에서 출발하는 사랑 이야기다. 모바일과 게임, 인터넷을 통한 번개팅 등 흔히 ‘요즘 젊은 세대’의 문화로 거론되곤 하는 것들을 즐기며 경쾌한 속도로 살아가는 여자와 그런 시류에서 동떨어진 듯 독서와 자전거 산책을 즐기며 느림의 멋을 추구하는 남자. <마들렌>은 선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세계가 만나고, 서서히 화음을 이루게 되는 과정을 참으로 충실하게 따라간다.
이쯤 되면 관객은 뻔히 알고 주인공 남녀만 모른 척 해피엔딩을 향해 티격태격 하는 로맨틱코미디로 흐를 법한 설정이지만, <마들렌>이 택한 길은 멜로드라마의 정공법에 더 가깝다. “누가 결혼하재 우리 한달만 사귀자”는 희진의 제안은 가볍고 장난스럽되, 젊은 연인들이 감정을 키워가는 연애의 디테일을 담는 시선은 꽤 진지하다. 로맨틱코미디의 치고받는 리듬의 탄력도 없지만, 웃기기 위해 애쓰는 과장된 상황도 없다.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할 정도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을 차근차근 쌓아올릴 뿐. 연애의 사소한 일상을 엿보는 재미는, 캐릭터들의 개성과 더불어 <마들렌>의 맛을 내는 주재료다.
모범생 같은 지석은 첫 데이트 장소로 캠퍼스와 도서관을 고르고, “기껏 여기”냐고 면박을 준 희진은 지석의 책 중 제일 두꺼운 <달의 궁전>을 베개 삼아 잔디밭에 드러눕는다. 생일이 아니라도 T.G.I. 프라이데이에서 생일 서비스를 받는 것쯤 태연히 해내는 희진과 혹 들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지석. 하지만 지석이 시간 낭비라 생각했던 게임에 조금씩 빠져들고, 희진이 비오는 날의 자전거 산책에 동참하는 동안 둘은 차츰 서로에게 길들여져 간다. 희진이 <달의 궁전>을 100쪽까지 읽었다며 뿌듯해하고,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등록하는 법도 모르던 지석이 문자메시지를 빠르게 입력하는 변화에 이르는 교감의 과정은 촘촘하고 사실적이다. 희진의 실연을 3D 컴퓨터그래픽으로 월드컵 축구 게임처럼 표현한 튀는 장면도 없진 않지만.
그런데 풋풋하게 시작된 연애담은, 희진이 헤어진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밝히면서 비장해진다. <색즉시공>이 그러했듯, 종종 육체적 관계가 거의 배제된 예쁘장한 로맨스나 섹스에만 탐닉하는 일탈의 욕망으로 포장되는 20대의 성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은 눈여겨볼 만한 시도. 순결 이데올로기에 얽매이기보다는 당당히 사랑의 결과와 책임에 대해 고민하는 희진과 지석은 솔직하고 건강해 보인다. 하지만 좀 밋밋하더라도 관계를 꾸려가는 묘사가 세밀한 전반부에 비해, 낙태 시술대에 올랐던 희진이 도망치고 남자친구에게 협박당하는 등 극적인 해프닝 위주로 급작스럽게 심각해지는 후반부로 가면서 극의 밀도가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
♣ 영화에서 희진과 지석이 제빵사 지망생 친구 만호에게 선물받은 마들렌은, 미래의 어느 순간 그 부드러운 맛과 함께 떠올릴 현재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만남과 이별, 재회라는 멜로드라마의 틀을 따르는 <마들렌>에서 눈길을 끄는 점 하나는, 뒤바뀐 성 역할.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만큼 터프하진 않지만 수줍은 지석에게 먼저 연애를 제안하는 희진은 물론 털털한 록밴드 보컬 성혜, 희진의 친구 유정 등 <마들렌>의 여성들은 당차고 적극적이다. 반면 지석이나 짝사랑하는 유정에게 조심스레 쪽지를 건네는 최대리 같은 남성 캐릭터들은 소극적인 편. <엽기적인 그녀>를 대표선수로 <오버 더 레인보우>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등 멜로의 코드를 가진 영화들에서도 전형적으로 순종적인 여성은 드물어졌만, <마들렌>처럼 여성 캐릭터들 대부분이 씩씩한 경우도 드물다. 이미 TV에서 깔끔한 외모와 순정을 간직한 듯한 캐릭터로 주목받은 조인성, <화산고>에서 청순하면서도 당찬 역할을 소화했던 신민아는 <마들렌>의 연인들로 썩 어울리는 조합. 단, 캐릭터를 감안하더라도 “사람들이 사라진 거리를 산책하는 기분이 들어서”새벽 신문배달을 좋아한다는 지석이나 희진의 문어체식 대사는 이따금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영화학도라는 성혜가 빔 벤더스의 <로드무비>를 논할 때 의도하지 않은 웃음을 자아내는 것도 그 때문. 귀에 익지 않은 문어체와 ‘닭살’스러움이 적지 않지만, 실제 내밀한 연애의 소우주에는 영화에서처럼 한없이 유치해지고, 지레 진지해지는 순간들이 존재하는 만큼 두 주연배우의 화사한 젊음과 의욕에 속아줄 법하다.
♣ <마들렌>에서 눈길을 끄는 점 하나는, 뒤바뀐 성 역할. 희진은 물론 털털한 록밴드 보컬 성혜, 희진의 친구 유정 등 <마들렌>의 여성들은 당차고 적극적이다.
<마들렌>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에게 어린 날의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빵의 이름. 영화에서 희진과 지석이 제빵사 지망생 친구 만호에게 선물받은 마들렌은, 미래의 어느 순간 그 부드러운 맛과 함께 떠올릴 현재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관계를 맺고 성숙시켜가는 20대 남녀의 사랑을 꾸밈없이 소박하게 따라가는 영화로, <퇴마록> 이후 5년 만에 영화 현장으로 돌아온 박광춘 감독이 오랜만에 연출을 맡았다. 황혜림 blaue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