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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적 양식의 고어영화의 편에‥,〈 H 〉
2002-12-24

■ Story

임신부를 대상으로 한 엽기적인 살해사건을 잇따라 접한 경찰 강력반은, 이 사건이 1년 전 여섯명을 연쇄살인한 뒤 자수했던 신현(조승우)에 대한 모방 범죄일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 사건은 특히 수사팀의 팀장 미연(염정아)과 강 형사(지진희)의 마음에 남아있는 상처를 헤집는다. 두 사람이 사형수로 복역 중인 신현을 만나 수사망을 좁히는 동안 다섯 번째 모방 범죄까지 저질러지고 만다. 여섯 번째 사건을 앞두고서야 수사팀은 범죄자의 신원을 눈치챈다.

■ Review

<H>는 보는 이에게 기분 좋은 일격을 가한다. 두뇌게임에서 관객과 팽팽한 승부를 벌이는 범죄스릴러이기 때문이다. 범죄스릴러는 한국에서 매우 드물게 만들어지는데다, 내가 아는 제일 훌륭한 스릴러영화는 40년 전에 만들어진 <마의 계단>(감독 이만희, 1964)이라고 할 정도로 영화의 수사학이 덜 발달한 장르 가운데 하나다. <H>는 이야기와 스타일이 공히 어느 정도의 안정감을 보여줌으로써 이 분야에서 오랜만에 나온 수작이라고 기록될 만하다.

이 영화의 첫 번째 흥미 포인트는 이야기다. 여섯 번째로 살인한 시체를 큰 가방에 담아든 채 자수한 신현이 감옥에 갇힌 지 1년 만에 그의 수법을 똑같이 흉내낸 범죄가 차례로 저질러진다. 형사들의 추궁에 대해 신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심리전 같기도 하고 엉터리 형이상학 같기도 한 말들을 나직이 읊조릴 뿐이다.

과연 신현이 배후조정자인가 그렇다면 독방에 갇혀 있는 사형수가 어떻게 거리에서 활보하는 일반인들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나 신현이 죽은 뒤에도 사건이 계속된다는 것은 그가 단순한 떠버리 망상가에 불과했다는 뜻인가 수사팀의 미연과 강 형사는 신현과의 대결에서 각각 승자인가 패자인가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 질문들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끝까지 붙잡아둔다.

스릴러나 공포영화의 관건이 괴물 같은 범인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형상화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현이라는 캐릭터와 그 배역을 연기한 조승우는 이 영화의 승부처를 책임지고 있는 두개의 중심인 셈이다. 둘은 잘 어울린다. 물론 이 영화의 설정과 스토리라인이 앞서 나온 국내외의 몇몇 스릴러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중에서도 <양들의 침묵>에서 보여준 앤서니 홉킨스의 괴물스런 카리스마를 기준으로 본다면 조승우에게서는 여릿한 풀냄새가 날 뿐이다.

하지만 모방과 변형도 잘만 하면 창조의 반열에 든다. 아직 덜 자란 미소년 같은 해맑고 예의바른 얼굴 뒤에 자신이 적그리스도라도 되는 양 세상을 응징하고 사람의 심리를 조정하겠다는 망상이 차갑게 똬리를 틀고 있는 희대의 살인마라니. 신현이라는 인물은 선과 악의 이중성 혹은 평범함과 괴물스러움의 배합이라는 장르 코드 측면에서 합격선에 도달했다고 보여진다.

<H>는 범죄스릴러이면서도 상당량의 고어 효과를 사용한 고어영화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잘리고 찢기고 토막난 육체를 클로즈업과 큰 숏들로 교차편집해가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낭자하게 밀려오는 헤모글로빈에 넋이 나가도록 만드는 고어영화는 한국에서 범죄스릴러만큼이나 만들어지기 어렵고, 차라리 기피 대상이라 할 만하다. 반면 이 영화는 부패한 시체, 잘려나간 육체의 일부, 흐르는 피와 그 피로 그려진 그림 등이 도처에 넘쳐난다.

고어영화는 흔히 사회적으로 전쟁과 같은 대학살이 일어난 시기에 작가와 비평가들의 주목을 얻는다. 그렇다면 50년간 ‘평화’를 누린 이 땅에서 왜 이렇게 피로 얼룩진 영화가 새삼 등장하는 것일까. 그 답은 물론 영화 안에서 발견된다. 연간 100만건이나 낙태수술이 행해진다는 산부인과 병원들이야말로 아무런 자의식도 없이 일상적으로 살육이 벌어지는 홀로코스트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이 영화에 깔려 있다. 그 대학살의 공포로부터 살아남은 한 병든 영혼이 세상을 응징한다.

그가 겨눈 복수의 칼끝은 불행하고 진부하게도 모두 여성을 향하고 있다. 여성들의 육체는 잔혹한 액션극의 무대가 된다. 감독은 생명의 저 반대편에 있는 죽음과 부패, 역겨움의 대상이 된 인간의 육체를 관객 앞에 반복적으로 던져놓음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범죄자의 냉소적인 시선과 맞닥뜨리도록 강요한다. <H>는 우리를 역겨움과 무감각이라는 양날의 덫 속에 가두어놓는다. 고어영화의 범주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의식을 조종하는 신비한 악령 이야기라면, <H>는 그것을 최면이라는 소재로 바꿔 끼웠다.

(왼쪽부터 차례로)♣ 과연 신현이 배후조종자인가? 그렇다면 독방에 갇혀 있는 사형수가 어떻게 거리에서 활보하는 일반인들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나?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 질문들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끝까지 붙잡아 둔다.♣ <H>에서 `소어`만큼이나 중요한 키워드는 `최면`이다. 관객은 반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뒤늦게 깨닫게 된다. <양들의 침묵>에서의 앤서니 홉킨스를 연상시키는 신현의 모습. 하지만 공포스러움은 다소 덜하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느낌은 촬영 스타일과 조명, 프로덕션디자인의 일관성과 크게 상관이 있다. 홍보문구에 따르면 필름누아르 스타일인데, 그보다는 귀족적인 양식의 고어영화라고 부르는 편이 조금 더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촬영은 호주 출신의 DP인 피터 그레이가 맡았다.

사진작가 출신으로 영화에 첫 데뷔한 지진희의 연기가 안정감 있는 편이고, 이 영화의 인물 가운데 가장 사실적인 연기톤을 취한 성지루가 도리어 이색적으로 보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염정아의 연기는 냉철한 침묵이라기보다 덜 표현된 듯한 아쉬움이 있고, 잘해보려는 의지에 불타는 신인 감독들의 영화가 종종 그렇듯 적정선보다 조금씩 길어 보이는 테이크들이 있는 것 같다.

궁금한 것 한 가지. 미연의 애인 한 형사가 자살했던 이유는 단지 신현을 놓쳤기 때문인가 신현과의 관계에서 강 형사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을 가능성이 여러 번에 걸쳐 강력하게 암시되어 있다.김소희/ 영화평론가 cafe.daum.net/cw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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